꾹꾹 눌러쓴 뇌성마비 장애인의 삶
안녕하세요. 저는 새롭게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엄작가입니다. 제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많은 분들과 좋은 작품, 혹은 좋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를 위한 독서 아카이브도 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브런치는 작품 서평만이 아니라 저의 일상도 함께 담기게 될 것인데요, 이는 단순히 작품만 이야기하기에는 그 무게감이 너무 무거워질 것 같아서입니다. 조금은 가볍게 많은 분들과 편한 대화 방식으로 이 브런치를 이끌어 가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처음 발행하는 글이다 보니 조금 서두가 길어졌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착한 사람 문성현]이라는 작품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착한 사람 문성현]은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윤영수 소설집 [착한 사람 문성현]에 실려있는 표제작입니다. 분량은 단편소설 정도의 분량으로 현재 해당 소설집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데요, 그나마 다행인 건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 중인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에 해당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이 책을 참고로 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대학에 다니던 2006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습니다. 그때도 이 책은 절판된 상태였기 때문에 경희대학교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이 책을 빌려 읽었었는데요, 그때 유난히 이 작품이 저에게 꽂혔던 건 아무래도 저의 개인사 때문일 것입니다.
2006년은 저의 어머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던 해거 든요.
이 작품에서도 어머니와의 이별이 담겨 있다 보니 조금 더 저에게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당시에 이 책을 읽고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을 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 작품을 읽어보고는 제가 왜 그토록 이 작품에 큰 마음을 주었는지 알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착한 사람 문성현]은 발간된 그 해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이 책을 읽은 지 10년이 넘다 보니 표제작 말고 다른 작품들이 어땠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페이지가 아릿했다는 느낌 정도는 아직 남아있네요.
이 작품을 쓴 윤영수 작가에 대해 우선 간단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윤영수 작가의 본명은 윤영순입니다. 필명을 만든 이유는 어쩌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은데요, 작가님께 직접 여쭤본 적은 없기에 그저 저의 추측이라고만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윤영수 작가는 1952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경기여자중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난 후,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1980년에 교직을 떠나고 1990년 계간 <현대소설>에 단편 [생태관찰]이라는 작품으로 제1회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타나게 됩니다.
윤영수 작가는 소외된 삶, 소수자, 혹은 밑바닥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무너지기 직전의 가족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의 소설집 [소설 쓰는 밤]이라는 책에서는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 옴니버스 단편영화처럼 서로를 스치며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는데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 책도 한번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착한 사람 문성현]의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바로 '뇌성마비 장애인의 일대기'입니다. 뇌성마비를 가진 문성현을 주인공으로 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작품의 시작은 그의 탄생이 아닌 죽음으로 시작해서 처음과 끝이 만납니다)
문성현은 1957년 7월 종로구 동숭동 130번지. 그만하면 사대문 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남평 문 씨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납니다. 혼사를 치른 지 두 달도 안되었지만 '이렇게 소식이 없다니 집안의 대가 끊길 것이 분명하다'라는 말을 내뱉는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문성현의 탄생에 기쁨을 넘어서 감격스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손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문성현의 상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만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차남 우현이 태어나고 그 밑으로도 정희와 승현 남매가 생겨나면서 관심 밖으로 내보내고맙니다.
시부모가 바라던 5남 2녀는 채우지 못했지만 착한 며느리로서, 현명한 아내로서, 3남 1녀의 자상한 어머니로서 그녀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도리를 충실히 해내었다.
동생들은 조금씩 자라나는데, 문성현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방안에서만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동생들은 그런 문성현을 무시하거나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학교에 갈 때와 돌아올 때면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위해 맛있는 군것질 거리들도 사다 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성현의 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마는데요, 문성현은 대소변을 치워주던 상주댁이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가 암에 걸린 건 성현이 때문이다'라고 한 것을 듣고 맙니다. 장남이 저 모양이니 아버지 속이 병든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문성현은 사이다병을 깨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립니다. 이렇게 자신이 죽고 나면 모두가 죄책감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행한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 일로 아버지의 병은 더욱 악화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결국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와 동시에 집안의 경제적 여건은 힘들어집니다. 문성현은 자신이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무료 요양원에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에 간 그는 그곳에서 깨닫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 집안에서 지내왔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는지를 말이죠. 결국 문성현은 일주일 만에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집안은 그들이 살던 동네인 동숭동이 문화의 거리로 바뀌면서 오히려 풍요로운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40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모든 것이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집안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안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머니마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14평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 문성현은 그곳에서 방문형 파출부인 예산댁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지내게 됩니다. 동생들은 끊임없이 그를 챙기며 함께하자고 했지만 혼자 있는 것이 편했던 문성현은 그곳에서 혼자 지내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상이 [착한 사람 문성현]의 전체적인 스토리입니다. 이렇게 스토리만 들어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인물들을 통해 이 작품은 특별한 작품이 되는데요. 지금부터 제가 이 작품을 특별하다고 느낀 포인트 세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 - 꾹꾹 눌러쓴 뇌성마비 장애인의 삶
작가가 글을 쓸 때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의 삶을 살지 못했을 때입니다. 조금 더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저는 남성인데 여성을 화자로 글을 쓴다거나/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화자로 글을 쓰는 경우죠. 물론 글을 쓰는 행위에 있어서 상상력은 중요한 것이고 내가 모든 것을 상상해서 쓸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이거나 소수자일 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윤영수 작가는 뇌성마비를 가진 문성현을 주인공으로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갑니다. 사실 이 작품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는 저는 뇌성마비를 가진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들도 이 작품을 저처럼 느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윤영수 작가는 꾹꾹 눌러서 진심을 담아 이 작품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날부터 그는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절대로 울지 않았다. (중략) 자신의 울음소리는 그 누구에게 보다도 스스로에게 너무나 끔찍하고 지겨웠다. 그는 벙어리처럼 행동했다. 배가 고파도, 대소변으로 아랫도리를 적셔도 그는 짜증을 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다른 이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그는 다만 참고 견뎌내었다. 그때부터 그는 슬펐다. 울음을 몸 밖으로 터뜨리지 않으니 몸 안에 눈물이 고였다.
문성현은 스스로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끔찍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묘사는 요양원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되는데요,
다섯 평 남짓한 방 안에 이십여 명이 뒤엉켜 버르적대는 모습을 본 순간 그는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방바닥에 너부러져 납작하게 엎드린 채 잠자는 어린아이, 머리가 옆으로 심하게 돌아가 마치 목을 몸통에서 따로 떼어 놓은 듯했다. (중략) 온 사지가 버둥거려 그의 모습은 마치 하늘을 보고 자빠진 풍뎅이, 바퀴벌레 같았다. 성현은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이 곧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 역시 바로 그들처럼 사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중략) 무엇보다도 더욱 무참했던 것은 방방마다 가득 수용되어 있는 장애자들 거의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자신은 이들의 두 배 가까운 세월 동안 두 배가 큰 몸집으로 버르적대며 가족들을 괴롭혀왔던 것이다.
이처럼 뇌성마비를 가진 이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적나라하고 혐오스러운 표현을 사용함에도 그것이 비하가 아닌 그들을 표현하기 위한, 그들을 향한 작가의 관심을 통해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한 두 단락을 인용해서는 저도 전달 할 수가 없는데요, 이 작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문성현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모습들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문성현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은, 작가가 뇌성마비를 가진 이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나와는 다른 뇌성마비를 가진 이를 표현한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혼자 있으려고 하는 문성현은 자신의 버르적거리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음입니다. 하지만 이는 문성현 개인의 감정이 아닌, 누구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감정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에 나오고 있는 문성현의 아픔을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포인트 - 아파트, 풍요로움, 그 안에 갇혀 있는 누군가
[착한 사람 문성현]을 읽다 보면 영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바로 <원더>인데요, 장애를 가진 아이가 사람들 앞에 헬맷을 벗고 서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종종 다음과 같은 영화평들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현실성이 없다. 저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집에 돈이 엄청 많아야 한다. 모든 가족이 다 착한 건 말이 안 된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라면 위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아실 텐데요, [착한 사람 문성현]에도 이러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요양원에 간 문성현이 스스로에게 말했듯 본인은 다른 뇌성마비를 가진 이들보다 안락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경제적 풍요로움 덕분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풍요로움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성현은 아파트 생활에 곧 익숙해갔다. 그의 방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었다. 성현은 자신의 배설물을 스스로 처리 할 수 있게 되었다. 꿈 같은 일이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사람을 사랍답게 만들어준 셈이었다. 새로 구입한 푹신한 의자도, 리모컨으로 조절할 수 있는 텔레비전과 전축, 무선전화기도 참으로 편리했다. 벽을 따라 나지막이 놓인 정리장은 그의 깔끔한 성품에 꼭 맞는 가구였다. 더 이상 몸이 나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 그는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작품 초반에 나오듯 동숭동에 위치했던 문성현의 집은 문화의 거리로 (지금의 대학로) 바뀌면서 한옥을 비싼 값에 팔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경제적 풍요로움을 얻게 됩니다. 문성현이 57년생으로 설정되고, 한옥을 팔아 아파트로 이사한 것이 그의 나이 서른이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시대적 배경은 80년대 말, 90년대 초가 됩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 가던 시기죠. 이러한 풍요와 성장을 수직형인 아파트라는 공간을 통해 작가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고립된 삶을 함께 보여줍니다. 문성현이 한옥에 살 때는 이웃들의 모습이 계속 등장합니다. 양품점 과수댁이거나, 연탄장수, 혹은 돌잔치에 찾아온 많은 이웃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후반 아파트로 공간이 바뀌면서부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문성현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며칠을 굶어 살이 빠져도 그에게 말을 거는 이웃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보살피기는커녕 자신을 괴롭히고 돈까지 듣어가는 방문형 파출부인 예산댁을 문성현은 내치지 못합니다. 이는 작가가 풍요로웠던 그 시기에 버림받고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작품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포인트 -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모두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철학자죠. 사실 그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닌 질문을 하는 사랍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네 분수를 알아라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사실 더 직접적인 뜻은 네가 얼마나 모르는지 알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문성현은 본인이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제목 그대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다만 궁금함 때문에, 끝없이 밀려오는 격심한 통증을 잠깐 잊고 잠이 든 어머니를 깨우는 자신은 참으로 극악한 인간이었다. (중략) 어머니, 내 몸이 ... 언제부터 이랬어요.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요? 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이렇게 태어났어요?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나요? (중략) 용서해드릴게요.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게요. 어머니가 실수하셨어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다시 눈을 떴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힘들겠지, 성현아? 너 ... 이 에미 없이 혼자 사는 게 ... 아무래도 힘들겠지? 어쩌면 좋으냐,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문성현은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물어봅니다. 자신이 이렇게 태어난 이유가 혹시 어머니에게 있지 않은가라고. 자신을 가졌을 때 못된 것을 먹었거나, 어린 시절 높은 곳에서 떨어드린 것이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동생들은 모두 멀쩡하고 본인만 뇌성마비로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바로 통회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죄를 저질렀는지 그 자리에서 깨달은 것이죠. 그렇기에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자신을 목욕시켜주러 온 교회의 봉사자들이 영세를 받으라고 권했을 때 문성현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봉사자들의 하느님, 어머니의 하느님, 그러나 성현은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없었다. 하느님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봉사자들의 하느님, 어머니의 하느님 품 안에는 아버지, 할머니, 그 외의 다른 많은 착하고 좋은 분들이 깃들여야 했다. 자신처럼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은 가까이 범접하지 않아야 했다.
자신은 죄가 많은 사람이라서 하느님 품에 깃들 수 없다는 문성현의 태도는 죽음 앞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동생 우현의 대사인데요,
"형이 ... 부모님 곁은 싫다고, 화장한 후에 산이고 강이고 멀리 뿌려달라고 했지만, 그래서 저도 형의 말에 따르겠다고 약속했었지만 ... 어머니, 다른 곳은 못 미더워서 어머니 곁에 데리고 왔습니다. 형은 ... 아버지 어머니께 너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물론 이러한 문성현의 심성 이외에도 외적으로 착한 행동들도 나옵니다.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가는 예산댁을 용서해주거나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죠. 하지만 그가 '착한 사람'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외적인 모습들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자신의 악함을 아는 바로 그 지점들 입니다.
[착한 사람 문성현]은 겉으로는 뇌성마비를 가진 문성현의 가슴 아픈 일대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전체적 스토리와 세 가지 포인트에서도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이 더 남아있습니다. 특히나 활에 대한 이야기를 빠트린 것은 조금 서운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남겨 놓는 것이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한번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서두를 꺼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남겨두기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추천드리면서 제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작품을 지하철이나 버스 혹은 밖에서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물이 흘러서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되니까요.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