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과 show, 그 사이 어디쯤
1976년에 발표된 단편소설을 2020년에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어려울 수도 있고,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 촌스러움에 책을 덮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현기영 작가의 <소드방놀이>를 읽으면 혹시 오늘 쓰인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계급사회의 부정부패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정말 소름 끼치도록 지금의 우리 사회가 정확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76년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난 현기영 작가는 '4·3 작가'로 불린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순이삼촌>과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들 수 있다. 내가 현기영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군대에 있을 때였다. 당시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를 통해 소개되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불온서적으로 분류가 되어 부대 안으로 반입할 수가 없었다. 사회에서는 다들 읽으라고 하는 책을 부대에서는 불온서적이라고 하다니, 나는 처음에 뭔가 오기가 된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불온서적 리스트에 적혀 있는 걸 내 눈으로 보았었다. 하긴 당시에 나는 '한겨례21' 시사 주간지를 가지고 있다가 중대장한테 끌려가기도 했다.(한겨레 21도 불온서적이라고) 지금 돌이켜보면 불온서적 리스트를 만든 담당자가 누군지 진짜 궁금하다.
원래는 <순이삼촌>을 소개하려고 하였는데, 리뷰를 위해 다시 읽다 보니 <소드방놀이>를 소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이 작품으로 최종 선택했다. <순이삼촌>은 다른 분들이 쓴 리뷰들도 많고, <순이삼촌>에 비해 덜 알려진 <소드방놀이>를 소개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순이삼촌>도 나중에는 꼭 리뷰를 할 예정이다.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 '소드방'은 솥뚜껑의 제주도 사투리다. 예전에는 부형이라는 벌이 있었는데, 이는 사창미(관아의 곡식)를 축낸 관리를 끓는 가마솥에 집어넣어 찜쪄 죽이는 잔혹한 증살형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솥뚜껑 하나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으로 끝나는 보여주기 식 벌로 변형된다. 증살형이 보여주기 식 벌로 변형된 이유는 지방 방백이나 수령들이 자기 죄를 대신 짊어진 심복 아전을 차마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아전 윤관영은 사또의 명을 받아 사창미를 몰래 팔아 청탁을 위한 돈을 마련하였다가 '환곡미 이백석 이상 범포한 자를 적발하고 대회군민하여 효수하라'(사람들 앞에서 벌을 내리고 목을 잘라 결어라)는 어명이 떨어져 옥에 갇히게 된다. 사또는 일단 아전인 윤관영을 사람들 앞에서 벌을 주고 이 일을 마무리할 요량으로 부형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하지만 흉년이라는 악재와 돌림병, 그리고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민란으로 인해 이를 실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배고픈 백성들에게 밥(죽)을 한 그릇이 내어주고 그 분위기에 얼렁뚱땅 부형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관영의 부형과 백성들에게 밥(죽)을 내어주는 진휼을 같은 날 진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당일,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부형을 진행하고자 윤관영이 소드방 앞으로 나오자 백성들은 들고 있던 죽그릇과 돌을 던져 그를 죽이고 만다. 사또는 성난 백성들의 원망이 자신에게 올까 겁을 내지만, 백성들은 윤관영을 죽인 것을 용서해 달라고 사또에게 엎드리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소드방놀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자 죄인인 윤관영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주인공의 감정이 서술되다 보니 묘하게 작품의 긴장감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읽는 내내 과연 사또는 약속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심도 함께하게 된다.
과연 사또가 약속을 지킬 것인가? 간밤에도 은밀히 사람을 옥으로 보내어 걱정 말라는 다짐을 준 사또였지만,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미심쩍은 생각이 앞서는 것이었다. 약속인즉슨 목 자르는 효수 대신 부형으로 때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중략) 혹시 처음부터 안되는 일 가지고 호책을 쓰는 거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더럭 치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상전과 허전 간에 맺어진 신의라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짝처럼 져버릴 리가 없어. 바로 그 신의 때문에 자기 죄를 기꺼이 넘겨받아 대신 짊어진 심복 아전의 모가지를 어떻게 벨 수 있는가 말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계획대로 될 때에는 간단하게 솥뚜껑 위에 올라섰다 내려오고 끝날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뒤틀리면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순간들의 연속. 그렇게 자신에게 닥칠 순간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감정과 함께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로 작가는 분위기를 쥐락펴락 한다. 가령 주인공을 향해 욕설을 날리던 백성들이 가마솥에서 자신에게 나누어 줄 죽이 끓어오르는 순간을 통해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그 장면은 다음과 같다.
마침 관노들이 부뚜막에 올라 일제히 솥뚜껑을 열어젖히자 장내는 물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뚜껑 열린 열 개의 가마솥에서 흰 증기기둥이 뭉게구름처럼 왈칵왈칵 치밀어오르고, 물씬거리는 고소한 쌀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저기 땅바닥에 맥없이 주저앉는 아낙네들이 눈에 띈다. 고소한 쌀냄새에 그만 어지럼증이 일어난 것이리라. 죽솥에다 마른미역을 세 삼태기씩 쏟아넣고 간장을 부었다. 빈 삼태기와 간장초롱을 함부로 밖에 내던지고 난 다음, 관노들은 긴 작대기로 천천히 죽솥을 휘젓기 시작했다. 흡사 열 척의 거룻배를 느릿느릿 노저어가는 사공들처럼 보인다.
구구절절한 묘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저 현장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는 쉬운 말들로 이루어진 문장과 작품 전체에 펼쳐져 있는 톤의 무게감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끊임없이 표현되는 부패한 고위관리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내가 뉴스에서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사또가 기껏 한다는 일은 향청의 유생에게 의뢰하여 먹을 수 있는 구황 식물 수십종을 방을 붙여 알리는 일과, 술과 떡 빚는 행위를 엄금하는 것뿐이었다. 그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디 먹는 풀이름을 몰라서 사람들이 매양 굶기를 밥먹듯 하고 있단 말인가. 소루쟁이, 냉이, 고들빼기, 조릿대, 원추리, 고시라, 둥굴레...... 어디 이름 몰라서 못 캐먹는가, 게을러서 굶는가. 숭덕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진흙으로 흙떡을 빚어 먹는다는데, 그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 죽이 좋은 줄 몰라 토식하고 있단 말인가.
흉년에 굶는 백성들을 위해 사또가 행한 일은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술과 떡을 빚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주인공의 말처럼 정말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란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백성들의 위기가 아닌,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 고위관리들의 위기인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문득 낙타고기 먹지 말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분급과정에서도 차등을 두어 이들에게는 일인당 쌀 여덟 말식 넉넉하게 주었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고작 세 말씩이었는데, 그것도 쌀이 아니라 수수곡이었다. 특히 영세소작인은 더욱 박대하여 겨우 수수곡 일곱 되였다. 명분인즉슨, 환곡미 상환능력이 모자라는 이들에게 함부로 양곡을 많이 나눠주었다가는 추수기에 받아내려면 골탕먹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흉작으로 백성들이 힘들어지면 구호 대상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데 없어도 되는 양반들에게는 오롯이 그들의 몫이 떨어지고, 영세 소작인에게는 아주 질 낮은 곡식을 적게 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상환능력, 즉 다시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지금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복지정책의 한 모습과 닮아 있다. 복지 대상자가 되려면 너무도 많은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서류로 증명하는 일은 정말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넘기 힘든 문턱이기도 하다.
어째서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 훨씬 도둑답다. (중략) 그건 백성들의 상상을 훨씬 능가해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금도 내가 뉴스를 보며 하는 말이 여기에 적혀 있었다. 역시 도둑질을 하려면 크게 해야 한다. 추상적인 가치를 훔친 사람은 도둑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기영 작가의 <소드방놀이>는 부패한 사회와 고위 관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항상 그렇게 넘어갔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하는 관리들의 모습.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백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들고 있던 죽그릇과 돌을 던져 아전을 죽여버린다. 다만, 그들도 결국에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높은 벼슬의 옷을 입고 있는 사또에게만은 머리를 숙이고 만다.
소요는 더이상 확대되지 않고 거기서 끝이 났다. 내친김에 사또에게 대들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거나 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냥 병신스럽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윤관영이가 너무 창졸간에 죽어서 허망스러웠던가? 맥없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복판에 수북이 쌓인 돌무더기와 깨진 사금파리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이윽고 모두 땅에 엎드려 대죄하였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표현이 있다. 다른 이의 죄를 짊어지고 떠나는 것인데, 주인공인 아전 윤관영은 사또를 포함한 고위 관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백성들의 돌팔매질에 죽고 만다. 그리고 백성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급 시스템이나 고위 관리들과 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손이 닿는 선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그것에서 끝이 난다. 이는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사회가 붕괴되는 것은 원치 않는, 즉 카오스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아, 그러고 보니 앞에서는 76년에 비해 지금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는 말을 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떠올려보니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것들은 어째서인가?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의 본성이라는 답만은 피하고 싶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방언과 옛말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뉘앙스가 분명해서 정확한 뜻을 모른다고 해도 읽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우리말이 살아있는 작품들이 앞으로도 많이 만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되레 그 편이 낫제. 대관절 요렇게 무도한 진휼이 어디 있당가? 손에 사발을 들고 나오라니, 우리가 걸뱅이여, 뭐여? 진휼그릇은 마땅히 저들이 마련해놔야지
돌림병이 돈다고 그런다지 않는가. 그릇 하날 여럿이서 쓰면 병이 전염된대여. 옘병, 숭년 들어서 굶기를 밥먹듯 하는 것도 서러운디, 숭년 때마다 옘병은 돌아쌓고......
참, 이 작품이 유난히 오늘 쓰였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지금도 변하지 않은 계급 사회의 부조리도 있지만 위의 문장과 마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