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타이르는가?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처럼 말하는 책이 있고,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처럼 말하는 영화가 있다. 이는 내가 직접 읽거나 본 것이 아니라, 수업시간 혹은 누군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듣는 간접경험을 통해 작품과 만난 경우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간접경험들은 종종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라쇼몽이 그 대표적이 예이다. 이 작품은 책만큼 영화도 유명해서 이리저리 주워들은 것들이 좀 있는 편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작품과 마주한 적은 없다. 다만 지나가면서 스쳐 본 이미지들이 쌓여 아주 모르는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이미지만 있던 라쇼몽을 이번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직접 읽게 되었다. 뭔가 나중에 읽을 북리스트에 담겨 있던 클래식 하나를 읽는 개운함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쇼몽을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연휴를 맞이했다. 제법 호흡이 길고 강렬한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그런데 라쇼몽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작품은 엄청 짧은 단편이다. 진짜 몰랐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어느 정도 길이감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었고, 책 제목이 라쇼몽이니 한 권 분량이 된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 책은 라쇼몽을 표제작으로 하는 단편집이었다. 전혀 예상 밖의 사실이라 당황하였다.
라쇼몽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892년에 태어나 1927년에 사망하였다. 30대 중반에 죽었으니 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셈이다. (말이 쫌 이상하지만, 나보다 어리다) 작가는 라쇼몽이라는 작품을 1915년, 그러니까 20대 초반에 집필하였으며 후에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192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부인의 동창생과 호텔에서 함께 동반 자살을 약속하였으나 여자가 변심하여 실패하였고, 후에 혼자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이러한 작가의 마지막을 알고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읽다 보면 쫌 느낌이 남다르긴 하다 - 은근 러브스토리가 많다)
내가 이번에 읽은 라쇼몽은 문예출판사에서 발간한 전자책으로 라쇼몽 이외에도 다양한 작가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내가 읽은 단편들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지옥변이라는 작품이었으나, 이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소개하기로 하고, 일단은 작가의 가장 유명한 라쇼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라쇼몽은 헤이안 시대에 교토 중심지에 세워진 2층 구조의 문이다. 그러나 980년 폭풍에 파괴되면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도적들의 소굴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다 버리는 시체안치소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라쇼몽에서 일어난 하룻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은 단 두 사람으로 주인공인 남자 하인과 마르고 여윈 노파 하나다. 작품의 시작은 비 오는 날 저녁, 집에서 쫓겨난 하인이 라쇼몽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시작된다.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을 잃은 하인은 이제 도적질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하인은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이 "......않는다면"을 완결하려면 당연히 그 뒤에 붙어야 할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용기가 없어 '도둑질이라도 해야겠다'라는 다짐을 하지 못하던 중, 일단 오늘 밤 지붕 있는 곳에서 비나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라쇼몽 2층으로 올라가려 한다. 그런데 시체들만 가득한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불빛과 인기척을 발견하고 그는 온몸이 얼어붙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노파 하나가 젊은 여자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을 보게 되고 그는 과감하게 2층으로 올라선다.
머리털이 하나 둘 뽑힘에 따라 하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파에 대한 격심한 증오가 조금씩 솟아났다. 아니, 노파에 대한 것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든 악에 대한 반감이 순간순간 강도를 더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을 하던 하인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노파를 악으로 구분 짓고 그를 향한 증오를 드러낸다. 그리고 노파를 사로잡고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묻는다.
이 머리털을 뽑아, 털을 뽑아서......, 가발을 만들려고 했지.
하인은 노파의 대답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실망하면서도 그를 향한 증오는 자신도 모르게 커진다. 이러한 하인의 낌새를 눈치챈 노파는 지금 자신이 머리를 뽑고 있는 여자는 거짓으로 삶을 살아온 악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뱀을 토막 내 말린 것을 건어라고 속이고 팔아먹은 뒤, 그것으로 생명을 유지했으니 자신이 살기 위해 머리를 뽑는 것에 별다른 불만은 없을 거라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그럼, 내가 다 벗겨가도 원망하지 말어.
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몸이니까.
노파의 대답을 들은 하인은 위의 말을 남기고 노파의 옷을 모두 빼앗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난다. 이렇게 여섯 페이지(전자책으로)가 안 되는 분량의 작품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 인간이 악을 저지르며 스스로를 타이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로 자신이 하는 부당한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람들. 그들의 민낯이 이 작품에 꽤나 강렬하게 박혀 있기에 지금까지 그 긴 시간을 버틴 고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러한 라쇼몽의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데, 바로 어제 끝난 드라마 '비밀의 숲2'에서도 나타난다.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으나, 마지막 드러난 검사의 외침은 자기 합리화였다. 누구나, 그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것이다. 이러한 검사의 외침에, 주인공은 우리들은 집행자이기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대답한다. 아 말은 묘하게도 나를 아프게 했다. 사실 나도 라쇼몽의 인물들처럼 혹은 비밀의 숲2에 나오던 그들처럼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이르며 악을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라쇼몽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나중에는 위에서 언급한 지옥변이라는 작품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러브스토리 작품들만 모아서 한 번 글을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