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극 속 인물들 같은, 그렇지만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인물들
김애란 작가의 작품들은 항상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연극적'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작가의 전공이 극작인 것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읽을 때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표현이다. 김애란 작가의 작품은 연극적이다. 그것도 고전극 같다.
연극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느낌은 대체로 인물에서 나온다. 작가가 만든 인물들은 대부분 경계에 서있다. 이는 처음부터 서사를 쌓아가는 방식보다는 어떠한 선택의 상황에 놓인 인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살인자를 찾으라 명하고 그 살인자가 자신임을 알아가는 오이디푸스처럼, 이미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자에게 빠져버린 페드라처럼, 이미 벌어진 사건의 중심 및 경계에 서 있는 인물들. 특히나 작가의 단편소설은 이러한 경향이 더욱 크다. 내가 오늘 소개하는 '가리는 손'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가리는 손'은 주인공이 아들의 생일상을 차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럭이 들어간 미역국과 불고기, 그리고 구운 갈치를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 평범하게 생일상을 차리는 것 같지만 묘한 긴장적 묘사가 덧붙는다.
반쯤 살아 있는 식재료를 만지면 늘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금기이되 아주 오랫동안 어겨온 금기를 깨는, 죽은 것을 죽이는, 심드렁한 희열과 혐오가 인다.
칼과 나무 도마에 거품을 칠한 뒤 식초로 한번 더 씻고 스테인리스 볼과 채, 접시, 숟가락도 닦는다. 숟가락은 입에 직접 들어가는 기구라 더 공들여 헹군다. 숟가락을 닦을 때마다 맨손으로 아이 입속 만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 애가 어릴 때 손가락에 거즈를 감아 양치시켜준 기억 때문일 거다.
주인공의 아들 재이는 살인사건과 관련된 인물이다. 10대들 몇 명이 폐지를 줍는 노인과 다툼이 있었는데, 10대의 의도치 않은 폭행에 노인은 목숨을 잃는다. 해당 사건에서 주인공 아들인 재이는 목격자로 위치한다. 하지만 다문화 소리를 듣는 재이는 단순한 목격자임에도 사람들의 입에 숨겨진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말로 오르내린다.
나도 아이에게 물은 적 있다. 몇 번 망설이다 어렵게 꺼낸 질문이었다. 재이는 한없이 서글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어떻게 엄마마저 그럴 수 있느냐는 듯 침울하게 답했다.
- 엄마, 나 아니에요.
순간 얼마나 안도했는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간 혼자 마음고생했을 아이를 껴안으며 사과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묘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아들 재이가 이제는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있다가도 핸드폰이 울리면 방에 들어가서 혼자 받거나,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하며 차별을 받는 일 등 재이는 엄마가 모르는 것들을 하나둘씩 담아내며 자라는 중이었다.
며칠 뒤 재이는 이제 노래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친구들이 "역시 넌 좀 특별한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게 싫다고.
- 왜? 칭찬이잖아.
재이 입가에 부루퉁한 기운이 서렸다.
- 엄만 한국인이라 몰라.
나는 깜짝 놀라 답했다.
- 너도 한국인이야.
엄마는 자신이 없을 때도, 재이 곁에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자신은 믿지 않는 신이 있는 교회로 재이를 보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가대로 활동하던 재이는 성가대 대표 자리를 둔 투표에서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다. 엄마는 이런 일을 경험할 때면 이제는 헤어진 남편을 생각한다. 그는 거리에서 불편한 시선을 받거나, 누군가의 차별과 혐오와 마주하면 이렇게 말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이 작품에서 도덕은 꽤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된다. 반쯤 살아있는 우럭을 손질하면서도, 다문화에 대한 차별과 마주하면서도, 학교에서 영양사로 일하는 주인공이 반찬이 부실할 때면 받는 횡령의 누명에서도, 주인공은 도덕에 집착한다. 그런 엄마였기에 아들이 노인 살인사건에서 보인 행동에 끊임없이 날을 세우는 것이다.
대장 아이가 노인에게 무슨 말을 내뱉자 다른 아이들이 일제히 깔깔댄다. 흥분한 노인이 여자애의 머리채를 잡는다. 대장 아이가 노인에게 발차기를 날린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맞은편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재이가 보고 있다. 노인은 발길질 한 번에 힘없이 픽 고꾸라진다. (중략) 약 오십초 쯤 지난 뒤 다시 등장한다. 동영상을 본 많은 이들이 이 장면에 꽤 집중했다. (중략) 조심스레 인형뽑기 기계 앞으로 가, 방금 전 두고 온 라이언 인형을 들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삭제요청을 해도 계속 업로드되는 현장 영상 속 모습은 위와 같다. 음성은 없고, 영상만 나와있는 해당 영상에는 재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담겨있다.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놀란 재이가 달아난 것 까지는 이해가 되었지만 다시 돌아와서 인형만 챙겨 들고 사라진 것. 재이는 경찰서에서 학원을 땡땡이쳐서 그것이 엄마에게 걸릴까 봐 그냥 간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엄마는 알고 있었다. 사건 당일에 재이는 학원 수업이 없었다. 이러한 일들이 엄마에게는 묘한 얼룩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얼룩은 차마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과 닿으며 작품은 끝이 난다.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었던,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키우고 싶었던 주인공은 아들이 생일 케이크의 초를 불어서 끄는 순간 아득해진다. 자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자신의 방식과는 다르게 자라난 아들. 앞으로를 그릴 수가 없다. 고전극 속 인물들이 진실과 마주할 때, 사건의 끝과 마주할 때 보이는 절망. 그것으로 이 작품은 마무리된다.
이처럼 고전극의 인물들과 닮아 있는 작품 속 인물들. 하지만 김애란 작가가 가지는 특별함은 이런 인물들은 작의적이거나 거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묘하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멀리 있는, 작품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런 인물이 아닌, 오늘도 출근길에 퇴근길에 만나게 될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김애란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