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너와 나의 PARCEL
최근에 어느 작가가 크게 문제 되었다. 내용인즉 지인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카카오톡 대화)를 그대로 소설에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사적인 대화를 가져온 것이 어째서 그토록 문제가 되었는가? 그것은 내밀하고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부분이 여과 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가와 그 지인을 아는 이들은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추후 인용한 대화를 수정하여 개정판을 다시 냈지만 이미 뿌려질 대로 뿌려진 책을 모두 수거할 수는 없었고, 그 지인을 아는 이들은 이미 모두 그 작품을 읽었다는 것이 수습할 길이 없음이었다. 나도 종종 대사를 쓸 때 내 주변의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인용하거나, 내 주변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을 모티브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가급적 그것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모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 일 때는 당사자에게 대본을 먼저 보내고 의견을 묻기도 한다. (지금까지 삭제 해달 라거나, 빼 달라고 요청받은 적은 없다) 어쨌든 해당 사건을 인터넷으로 접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작품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손보미 작가의 [담요]이다. 해당 작품은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으로 내게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작품이다. 사실 이때만 해도 작가들의 등단을 보면 꼭 나이를 확인했다. 괜스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등단을 하면 안심을 하고 나보다 어린 사람이 등단을 하면 묘한 질투감을 느끼곤 했었다. 손보미 작가는 딱 봐도 나보다 어린 작가였고, 뭐 얼마나 잘 썼나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읽다가 그녀의 팬이 되고 말았다. 이 작품 이후에 그녀의 책을 기다렸고, 지금까지도 발간하는 족족 그녀의 책들을 모두 사서 읽고 있다. 사실 손보미 작가가 창비학당에서 소설 강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수강 신청까지 했었다. (문제는 그 당시 회사 업무가 많아져서 결국 두 번 정도 출강하고 가지 못했다는 것) 아무튼 현재 내가 가장 기대하고 좋아하는 젊은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 없이 손보미 작가라고 말한다. 오늘도 역시나 서두가 길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손보미 작가의 등단작 [담요]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우선 손보미 작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시작해보겠다. 그녀는 위에 말했던 것처럼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런데 네이버 인물 소개의 약력을 보니 2009년에 이미 21세기문학 단편소설 부문 신인상 수상 이력이 있다. 그래서 기사를 보면 어디는 2009년 등단이라 나오고, 또 어디서는 2011년 등단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대체적으로는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등단작으로 보는 듯하다. 어쨌든 그녀는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부터 한국일보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등 다양한 수상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활동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그녀의 작품 대부분을 읽은 나로서는 이러한 결과가 당연한 것 같다. 워낙에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니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손보미 작가의 작품들이 가지는 특징을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이 작가는 거짓말을 너무 잘한다'이다. 손보미 작가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정말이지 검색을 하고 싶은 순간들이 엄청나게 찾아온다.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을까? 정말로 이러한 사건이 있었을까? 계속 궁금해진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검색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소설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가장 흔들렸던 건 [디어 랄프 로렌]이라는 작품을 읽을 때였는데. 이 작품에서 랄프로렌이라는 회사는 시계만큼은 만들지 않았다는 설정이 나온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 다만 작품 안에서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기에 그냥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이처럼 손보미 작가는 진짜와 가짜 사이를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즐겁게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능력은 등단작 [담요]에서부터도 드러난다. 이 작품의 스토리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화자는 소설가이다. 그는 친한 친구 한으로부터 직장 상사인 장의 사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그는 장의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쓰게 되고 그것이 큰 성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친구 한은 그것이 장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인지 아냐며 절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친구였던 한의 장례식장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소설에 썼던 장과 마주하게 된다.
화자가 소설로 쓴 장의 이야기는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록그룹 파셀(PARCEL)의 콘서트에 간다. 아들이 너무도 좋아하던 가수였기에 웃돈을 줘서 맨 앞줄을 예매해 함께 콘서트에 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프닝 곡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장의 아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아들이 죽고 장에게 남은 것은 담요 한 장이었다. 그것은 장이 콘서트장에서 아들에게 주었던 담요였다. 그는 그것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결말은 누구나 예상하듯이 장이 담요를 놓아주게 되고, 그것을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손보미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문체와 더불어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힘이다. 하염없이 뻗어나가는 것 같은 작가의 이야기는 끝에 도달하면 어느샌가 그 맺음새가 단단하게 맺어진다. 이 느낌을 전달하자면 '페이지가 몇 장 안 남았는데...' 하다 보면 이미 이야기는 단단한 맺음으로 조여지고 있고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 깨끗함에 놀라게 된다.
그럼 이제부터 손보미 작가의 [담요]를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굉장히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 '파셀(PARCEL)'. 이는 장이 아들을 잃게 되는 콘서트 무대 위에 올라온 록밴드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단어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각 인물들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가령 주인공 소설가에게 파셀은 나누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는 친구 한으로부터 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아닌지 구분을 하지 못한다.
그 당시 나는 장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장은 우리의 대화를 위해 어디선가 나타나 우리 사이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면 사라져버리는 '이야기 속의'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이 "넌 그 분의 인생을 훔쳤어! 그게 얼마나 치졸하고 역겨운 짓인 줄 모르는 거야?"하고 말했을 때에는, 한이 지나치게 화를 낸다는 생각에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화자에게 장이라는 존재는 한과의 대화 소재였을 뿐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를 그저 가상의 인물 같은 것. 즉 자신의 삶과 철저히 구분한(나누고) 장이라는 인물과의 관계 설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소설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한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우리들 삶과 상관없는 삶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러한 주인공의 태도는 한의 장례식장에서 장을 실제로 만나면서 뒤바뀌게 된다.
한의 장례식장에서 장의 얼굴을 보고, 나는 곧바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장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마술이 아니었다. 장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한 명의 진짜 인간이었다. 나는 그때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는데, 마치 몸의 일부분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략) 그 일 년 동안 소설을 쓸 수 없었다. 잠을 자려고 침대 위에 누우면 내 몸의 일부가 사라져 버리고, 남아있는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계속 부풀어 올라서 곧 터질 것 같았다.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장과 마주한 순간 주인공이 나누었던 관계 설정은 무너진다. 그리고 자신이 장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몸이 사라지고 뇌만 남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 그 상태가 일 년 넘게 지속되면서 화자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한다. 주인공의 이러한 상태는 장과 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진다. 어느 일요일 아침, 장은 주인공에게 전화를 한다. 출판사를 통해 전화번호를 알았다 말하는 그는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요.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말이오."
아들을 잃은 장에게 파셀은 일부분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쉽게 드러나는데 초겨울임에도 야외에서 진행되었던 콘서트였기에 장은 아들을 위해 담요를 준비했다. 적당히 두꺼우면서도 그리 무겁지 않은 갈색 담요였다. 콘서트장에서 녹색 외투를 걸친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쏜 총에 아들을 잃은 그는 언제나 담요를 가지고 다녔다.
장은 아들이 무대 위로 달려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대신 장은 아들의 어깨 위에서 담요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들의 어깨 위에서 떨어진 담요는 장에게 몹시 중요한 물건이 되었다. 그 후, 장은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게 된다. 담요를 가지고 출근했고, 책상에 앉아있을 때는 담요로 자신의 무릎을 덮었다.
장이 아들의 죽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은 담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담요는 아들의 일부분이면서 자신의 일부분으로 자리한다. 또한 담요를 덮는 행위를 통해 그는 아들과 같은 세계로 넘어간다. 화자가 관계를 구분했듯이 그는 담요를 통해 아들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를 구분짓고 오간다.
장은 아무 생각 없이 전등이 켜진 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전등이 꺼지는 장면을 목격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무언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몹시 두근두근 댔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모든 집의 전등이 꺼지고 나면 이번에는 장 자신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면 장은 담요에 얼굴을 묻었다.
장은 무려 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담요와 함께한다. 그러다 그가 담요를 놓아주는 일이 생긴다. 소설 속 표현대로라면 '담요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야간 순찰을 돌던 그는 한밤중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 커플과 마주한다. 장은 바닥에 널브러진 담배꽁초와 맥주캔을 보며 "당신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일 거야."라고 말하며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른다. 하지만 어린 커플은 자신들을 부부라 소개하며, 오히려 장에게 "자식이 있어요?"라고 되묻게 되묻는다. 장은 올해 스물한 살이 된 아들이 있다는 말과 함께 아들과 시간을 같이 가지지 못했다며, 파셀의 콘서트를 간 것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한다.
"그 부부에게 왜 담요를 주었냐고 아까 물었죠? 사실 내가 순찰차로 돌아오기 직전, 어린 부인이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소. '아들과 다른 공연을 보러 가세요. 사람들이 죽지 않은 콘서트요. 사람들이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추는 그런 콘서트 말이에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행복한 노래만 흘러나오는 곳이요. 나도 그런 곳에 가고 싶거든요.' 나는 차 안으로 돌아왔고, 조금 울었소. (생략)"
장은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부부에게 담요를 주었고, 주인공을 찾아와 이 이야기를 해준다. 이렇게 주인공과 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파셀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뜻 꾸러미를 만드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장은 주인공에게 솔직하게 고백을 한다. 자신이 담요를 어린 커플에게 준 이유를 사실은 자신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장이 주인공을 찾아와 담요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것을 소설로 써달라는 뜻일 것이다. 어디든 가져갈 수 있는 깨끗하게 포장된 소포 같은 꾸러미로 이야기를 맺어 달라는 것. 그렇게 파셀은 이 작품 안에서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손보미 작가의 [담요]는 끊임없는 분리를 보여준다. 관계의 분리, 세계와의 분리, 그리고 진짜와 가짜의 분리. 이야기는 어렵지 않지만 생명을 가진 것처럼 뻗어나가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들어가 있으며, 맺음새까지 좋은 이 작품을 꼭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덧) 해당 작품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품으로 조금만 검색해보면 소설의 전문을 기사로 읽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