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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스트 Nov 15. 2020

나를 찬 남자에게 복수하는 법

난 대학 4년 동안 미팅도 데이트도 한번 제대로 못했다.  전공이 영문과였는데 그때는 문과생 남자들이 그냥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좋다고 들이대는 과 남학생도 몇 명 있긴 했는데 그들은 시시하게 보여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대신 터프해 보이는 정치 외교과 선배가 더 멋지게 보였던  20대 초반의 걸린 나쁜 남자 신드롬은 나에게서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다.  남편을 만나기까지…


87년 88년은 민주화 항쟁으로 대학은 온통 데모와 최루탄 가스로 가득할 때였다.  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만난 정외가 학생들과 무리 지어 몰려다녔는데 그중 한 오빠를  좋아했다.   그 오빠를 본 친언니는 나에게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 넌 그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니?”   난 그냥 그의 굵은 목소리가 좋았고  20대 초반의 동갑내기 남자들보다 멋지게 보여서 반했나 보다.  


그 선배는 내가 관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못생겼다고 싫다고 했다.  다른 학생회 동지들과 몰려다니면서 그 선배를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외모로 거절을 당하니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데이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이상한 관계였지만 나는 그 선배를 만나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끝이라도 제대로 내고 싶었다.  난 매일 전화를 했고 매일 가족으로부터 대신 거절당했다. “ 지금 집에 없는데”.   난 선배가 아닌 그 선배와 같이 사는 가족과 통화를 매일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동전을 들고 다니며 공중전화 박스에서 수없이 전화를 했었다.  차가운 칼바람에 벗고 싶지 않은 장갑을 벗고 얼어 버린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던 그 겨울.  찬 바람보다 내 마음이 더 추웠던 그 겨울이었다.     


거절당했던 나의  찌질한 대학의 연애 시절은 그렇게 막이 내렸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모든 인연이 헤피 엔딩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  나의 스무 살 초반에 받은 상처는 그에게  외모 이유로 차였다는 것보다 마지막 엔딩 조차 제대로 못하게 했던 무시 받음이었을 것이다.      


작년에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코로나 전 마지막 한국 여행이 되었다.  난 데모하면서 같이 몰려다녔던 동기와 연락이 되었고 그래서 나를 뻥 찼던 그 선배도 같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30년 만의 재회다.  

그 선배는 영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경제난이 심하다고 툴툴댔다.   비싼 식당에서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먹은 저녁 식사 값을 내가 멋지게 지불했다.  보통은 남자들이 밥값을 내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관례지만 이 정도 밥값 정도는 주춤하지 않고 낼 수 있었던 나의 작은 복수 였다.  그런 나의 심리가 다시 찌질하게 느껴 졌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통쾌함를 느꼈다.  그리고 속으로 그 선배에게 말했다. “당신은 눈이 참 나빴어요. 그때 괜찮은 여자를  못알아 보았으니... ”      


통쾌함 보다 더 크게 느낀 것은 그 선배를 향한 감사함이었다.  그때 날 차서 너무 고맙다고.  그때 잘돼서 결혼이라도 했었다면 지금처럼 미국에서 영어 하면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어느 변두리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 확원장 마누라로 살고 있을 테니…  


분명 그건 내 운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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