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의 겨울은 한국보다 따뜻하다. 32년 전 추운 겨울이었던 오늘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셨다. 엄마가 얼어붙은 땅에 묻히던 그날 난 무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고 그 차가운 땅에 엄마와 같이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는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살면서도 내 마음은 추운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 태어난 딸이라면 엄마한테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말 “ 딸아, 넌 엄마처럼 살지 마라”.
내가 고2였을 때로 기억한다. 삼 남매를 키우시면서 아침마다 도시락 6개를 싸신 다음 하신 일은 언니와 동생보다 나를 먼저 깨우시는 것이었다. 나의 긴 머리를 빗고 그 당시 디스코 머리라고 불리는 헤어 스타일을 매일 만들어 주셨는데 그래서 10분의 시간이 필요하셨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의 예쁜 머리를 칭찬해 주시기도 하셨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면서 암투병을 하셨던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머리를 만져 주실 때 오롯이 나를 위해서 기도 하는 시간이었다고.
“엄마. 나를 위해 무슨 기도를 했는데? ”
“넌 엄마처럼 살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그리고 네가 이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했어.”
워낙 말수가 없으셨던 엄마였기에 살아계시는 동안 엄마가 나에게 한 말들이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머리를 빗어 주시며 하셨던 엄마의 기도는 내 머릿속에 늘 남아 있다. 그 기도는 엄마가 나에게만 남기신 유언인 것이다.
캐럴과 파티로 들떠있었던 크리스마스 날에도 밖에서 술을 드시느라 늦게 귀가하셨던 아빠 때문에 늘 혼자서 TV를 보고 계셨던 엄마의 등. 그것은 엄마의 외로움이었고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무언의 확실하게 전달된 메시지였다.
엄마는 행복하셨을까?
엄마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너무 많다. 어릴 때는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요즘은 너무 많다. 날 키우면서 무엇이 제일 힘드셨을까? 난 엄마에게 기쁨이 되었을까?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와 보낸 세월은 나의 철없던 유년 시절뿐이다. 엄마에게 받기만 하고 내가 보답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슬프다.
엄마는 늘 45살이다. 돌아가신 지 32년이 지나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간다. 내가 엄마가 되니 더욱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다. 그리고 사춘기 아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은 내가 엄마를 울게 했을 나의 말들과 엄마의 상처와 함께 두배가 되어 나의 마음을 찌른다.
“ 넌 엄마처럼 살지 말고 이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거라”.
우울한 대학 생활을 지낼 때도 사회에 나가 직업이라는 것을 같고 돈을 벌기 시작하고 뒤늦은 유학을 갈 때도 그 유언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 매일을 전투처럼 회사에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이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난 그저 미국 땅에서 생존하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었다.
난 작년부터 실리콘 벨리에 있는 한국 여성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힘이 되는 코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쩜 엄마가 나에게 원하던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 바로 그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리콘 벨리에서 일하고 살면서 힘든 이민 생활에 삶의 방향을 잃었거나 직장에서 커리어 관리에 힘들어하는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한다.
지금의 소박한 봉사의 마음을 키워 얼마 후에 누군가에 진정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중심을 지키고 성장하기 위해 오늘도 애쓴다.
아들에게 언젠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아들아. 넌 엄마처럼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