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세이지 스탠퍼드 대학 교수가 지필 한 “스탠퍼드식 최고의 수면법”이라는 책을 읽고 잠에 대해 일주일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잠에 얽힌 이야기를 끄집어 내본다.
죽은 사촌의 장례 기간 중 호텔에서 낮잠을 자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일하던 20대 중반에 가장 수면이 부족했던 것 같다. 낮 시간에 일하고 회사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또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했던 일이 많았다.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회식도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있었던 것 같다. 저녁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귀가하고 아침에 6시 전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려면 하루에 5시간 이상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곤한 날들을 보내다가 지금 생각해도 이불 킥을 할 정도로 창피했던 경험 중 하나는 회의 중에 잠이 든 것이다.
주말에는 집에서 편하게 쉬거나 밀린 잠을 보충할 수가 없었다. 재혼하신 아빠와 같이 사는 새어머니가 너무 불편해서 주말에도 부족한 잠을 보충하지 못하고 집을 나와 배홰를 했었다.
95년 4월 1일. 그날도 어김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고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때 사촌 동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면서 “언니, 오빠가 오늘 새벽에 죽었어”. 나의 동갑내기 사촌이 갑자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난 그 길로 가방을 챙겨 퇴근을 해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가까운 동네에 살면서 같이 자란 동갑내기 사촌의 죽음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모와 사촌 여동생의 이미 한참을 울어 퉁퉁 불어 터진 눈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난 다음날에도 회사를 가지 않고 병원 장지를 향했다. 울고 또 울고 지친 가족들 사이에 1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난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일어났다. 발길을 향한 곳은 그 당시 우이동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었다. 호텔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프런트 데스크에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 눈이 반이 감긴 채 물어보았다.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쉬고 갈 방을 주세요.
20대 여자가 혼자 대낮에 와서 쉬고 간다고 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라고 눈치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난 그날 방에 들어가자마자 방을 최대한 어둡게 만들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든 잠은 7시간이 지났다. 그날. 난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길고 개운한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비싼 돈을 내고 집이 아닌 호텔에서 낮잠을 자면서 까지 밀린 잠을 채워야 했던 그날. 잠이 너무 쏟아져 죽은 사촌을 위해 장례 지를 지킬 힘도 없었던 나의 20대 중반은 참으로 불쌍했던 것 같다.
같은 해 여름에 캐나다에 유학을 떠났다. 10시간의 장시간의 비행은 처음이었고 떨린 마음에 기내 안에서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밴쿠버 공항에 픽업을 나온 학교 직원이 하숙집에 데려다 주었다. 혼자 사는 인도계 말레이시아 출신의 주인집에서 깨끗한 방하나를 빌려서 지내게 된 것이다. 인상 좋은 주인집 아줌마와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짐도 풀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난 24시간 깨지 않았다.
생전 처음 간 낯선 나라 캐나다. 처음 방문한 홈스테이 집에서 가장 긴 잠을 잔 것이다. 다음날 주인아줌마가 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안도의 숨을 쉬면 말했다. 내가 죽을 줄 알고 걱정했다고 한다.
가족이 불편해 잠을 잘 수 없었던 한국에서 떠나 낯선 곳에서 가장 긴 꿀잠을 잔 것이다.
나의 어두운 20대의 스토리를 브런치에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때의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에 침대를 바꾸었다. 20년간 쓰던 오래된 침대를 버리고 내 수준에선 고급진 침대를 샀고 하얀색 침대보로 바꾸어 오성급 호텔 분위기를 내 보았다. 코로나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집에 가구나 물건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고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침실과 침대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난 지금 따뜻한 가족이 있고 긴 잠을 잘 수 있는 침실이 있다. 그리고 자고 싶을 때 낮잠을 잘 수 있는 내 생활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