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고민, 인생 고민
한 어린이 출판사에 운 좋게 합격해 2주 동안 다니다가 회사의 권고로 그만두게 됐다.
변명할 거리도 많지만 내가 부족했던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었다.
해고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1. 3년 차 경력임에도 기획 능력이 어설프다.
솔직히 말해 거의 3년 동안 일을 하면서 내가 직접 처음부터 기획해서 만든 책이 없었다.
있다고 해봤자 시리즈물 중 한 권을 맡아서 했던 경험이 다이다.
회사에서 그래도 정기적으로 기획을 해보라고 권해서
조금씩 기획도 해보긴 했지만 해봐야 해서 하는 기획이랑 책을 내야 해서 하는 기획은 무게가 달랐다.
나는 조금씩 기획을 했을 때 칭찬을 많이 들어서 난 기획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웬걸? 이 어린이 출판사에서는 내 기획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고, 결국 방향을 잃고 기획을 하다가
기획을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기획도 재능일까? 나보다 경력이 짧지만 이 회사에서 거의 1년 동안 다닌 친구의 기획서는 100% 통과했다.
2. 3년 차 경력임에도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이사님이 글 작가가 준 메일을 보고서 이에 대해 회의를 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글 작가님은 내용의 양이 괜찮은지, 판형은 어떻게 해야 할지, 구성은 괜찮은지 물어보셨고
혹시 너무 빽빽하게 될까봐 걱정이라고 메일에 쓰셨다.
원고 기획안과 원고를 자세히 살피며
의도대로 잘 되어있나 봐야하는데
아이고... 나란 사람은 빽빽하나 안 하나만 신경쓰느라
한글 쓰기 2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4페이지로 늘리면 벙벙해서 좋을 것 같다
라는 의견만 가지고 회의에 임했고 그날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원고 기획안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진도를 나가면 버거울 거 같아 2페이지로 구성했다고 분명히 써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간과한 것이다.
또한 한글 쓰기는 유아쪽의 도서라 낯설어 이게 내용이 괜찮은지, 구성이 괜찮은지 파악할 수 없었다.
판형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사님이 서재에 있는 다양한 판형의 책들을 들고와
하나씩 검토하는 걸 보고, 아 내가 이렇게 일했어야 하구나 깨달았다.
3년 차의 업무 능력을 기대한 사장님과 이사님이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쉬는 것을 보며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기획 능력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작가의 원고를 받고 어떤 걸 중점으로 봐야 하는지 알았더라면
이사님께 조금 귀찮아하시더라도 더 자세히 묻고 배웠더라면
조금 더 오래 다녔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찡하다...
요즘 어떻게 살고 무얼 생각하며 사는지는 좀있다 이어서 얘기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