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의 어느 날, 새로운 일자리로 이직한 첫날 2017년을 준비하기 위한 회의 자리에서 녀석은 나를 처음으로 찾아왔다. 딱히 그날의 회의 자리가 다른 날보다 유난히 부담스럽거나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전에도 수없이 하던 것들의 반복이었고 그날도 그냥 그렇게 늘 해오던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첫 회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녀석은 불현듯 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시작은 평소보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게 느껴진다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깊은 바닷속에 완전히 잠긴 것처럼 그곳을 가득 매운 공기는 내 위로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고 나만 느낄 정도였지만 호흡은 조금씩 가빠졌다. 당황한 마음에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론 최대한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처음으로 이직한 직장에서 첫 회의에 공황장애라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생전 처음으로 찾아간 정신과에서는 공황장애 초기라는 2016년의 마지막 달, 결코 원하지 않았던 친구를 내게 소개해줬다. 티브이를 통해 몇몇 연예인들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공황장애가 나에게도 찾아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든 첫 생각은 '내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나름 밝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고 난 그날 이후론 유달리 더 아침에 일어나 회사로 출근하기까지의 모든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회사에 가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위아래로 곤두박이칠 치는 것이 느껴졌고 짓눌리는 듯한 가슴과 가쁜 호흡은 아무리 숨을 크게 내쉬어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차마 전화할 용기도 나지 않아 그냥 문자로
죄송하지만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회사에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황장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을 그만두는 순간 찾아오는 내일의 궁핍이었다. 궁핍에 대한 두려움은 공황장애도 감히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공황장애보다 무섭다는 궁핍에 쫓겨 겨우 겨우 매일 무거운 발걸음을 떼야만 했다.
왠지 병원에서 준 약은 내키지 않아 잘 먹지 않았지만 그 이후 그래도 나름 나에게 찾아온 불청객을 내보내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주기적으로 운동을 나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마구 떠벌리며 말하고 다녔다.
나 공황장애래
나의 고백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말로 괜찮다며 나를 위로해주었고 그런 사람들의 말 한마디와 진심 어린 걱정은 내게도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잠시 뿐이었다. 불편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때면 어김없이 그 녀석은 다시 나를 옥죄어오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원망하듯 말했다.
공황장애라니 이런 한심한 놈
그렇게 왜인지도 모를 상한 자존심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반복하던 어느 날 하루를 마무리하던 내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래 나 공황장애지. 근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냥 공황장애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 생각과 함께 그날 나는 내가 공황장애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전까지는 불청객이라고만 생각했던 녀석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몰라도 나와 함께 할 친구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 친구는 언제인지도 모를 어느 날 홀연히 그리고 쿨하게 나를 떠났다.
하지만 1년이 조금 더 지난 2019년의 어느 날 이제는 완전히 내게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다시 날 찾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2시간이 넘는 회의가 한참 진행될 때였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던 무렵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친구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치듯 내 가슴을 누르기 시작했다. 잠시 당황한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는 찬 공기를 쐬러 나갔고 곧바로 마음을 진정시키곤 다시 들어왔다. 비록 오랜만의 방문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처음에는 약간 힘들었지만 어느새 영화에 집중하다 보니 영화가 끝날 무렵에 그 친구는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언제 또다시 그 친구가 나를 찾아올지는 모르겠다. 가까운 시일일 수도 있고, 조금은 먼 훗날 일수도 있으며, 앞으론 영영 못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공황장애가 나를 찾아온다 해도 이제는 예전처럼 찡그리고 스스로를 탓하진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오랜만에 나를 방문해준 조금은 불편한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은 알았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