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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 Jan 10. 2019

1. 까불지 마라

함부로 까불다간 다친다.

 30대가 되면 조금씩 주변 사람들이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친구관계도 마찬가지이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연락이 뜸해지거나 이유 없이 사이가 어색해지곤 한다.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의 사정과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삶이 달라지다 보니 조금씩 자연스레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와 다시는 직접 볼일이 없을 것 같은 사이라 해도 가끔은 친한 친구들을 통해 혹은 어떠한 경로로 삶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그리고 30대가 되면서부터는 가끔씩 예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소식을 들을 때도 있다.      


 나는 나름 강남 8 학군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사실 본래부터 강남 출신은 아니었다.

 시골 촌놈에 불과했던 난 학교에서 사고 치며 부적응하는 바람에 전학을 가게 되었고 부모님께서는 자식만은 강남에서 교욱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시골 아파트를 팔아 방배동 꼭대기의 반 지하로 무리해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한 번도 고등학교 내내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집에는 자주 놀러 갔다.


 당시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유행했는데 학교가 끝나면 곧잘 몇 몇 이서 우르르 몰려가 플스가 있는 친구들의 집에서 게임을 하며 놀고는 했다. 당시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때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놀던 친구들 집은 대부분 지금도 몇 십억이 훌쩍 넘는 강남의 고가 아파트였다.      


 하지만 바보는 행복하다 하지 않던가. 그런 것 따윈 알지 못하던, 세상 물정 모르던 난 비록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진 못했어도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며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 또한 없었다.


 당시 같이 어울리던 친구 중에서 유독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교복을 제외한 명품으로 온몸에 두르고 잘난 체하던, 입버릇처럼 ‘돈 없는 것들이 그렇지 머, 이래서 서민들은 안돼.’를 달고 살던, 지금 와서는 친구라고 부르기도 많이 어색한 그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대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나름 괜찮은 기업을 하는 사업체의 아들이었다. 당시 시가총액이 1천억이 넘는 회사였으니 오늘날로 치면 충분히 금수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가끔씩 몇몇 친구들과 함께 만날 때면 그 친구를 보곤 했는데 이 친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부터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그 친구의 소식을 오래간만에 들은 건 군대를 전역하고 난 이후였다. 주변 또래보다는 조금은 늦게 군대를 전역한 후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다. 당연히 유학 후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겠지 라며 생각했던 내게 들린 소식은 아버지 회사가 망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당시 그 소식을 듣고는 ‘정말 인생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아마도 20대에 들어서 사회를 경험하면서부터 점차 동창들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남들과 다른 나의 환경을 탓하기 시작했던 때라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적어도 당시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인생을 처음으로 조금씩 부러워하던 시기였다. 그런 내게 그 소식은 조금은 충격이었다.     


 그렇게 또 세월에 잊혀있던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그리고 이번에 들린 소식은 그 친구의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회사가 망하면서 이런저런 것들이 얽혔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30대가 되면 이런저런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삶의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과거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들릴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닥치기도 한다. 가장 빨리 결혼했던 친구의 이혼 소식이라든지,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든지, 혹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등. 20대엔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저 먼 남의 이야기로만 들렸던 소식들이 이젠 내 주변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경험한다.      


 그러다 보면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자연스레 이제 인생이라는 것이 20대처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호기로움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이 내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알게 되면 인생에서 조금은 겸손해질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비록 내가 남들보다 조금 앞서 있다고 해서 이것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막연함만을 쫓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30대라면 이 사실을 깨달아 가야 한다. 더 쉽게 말하면 지금 잘 나간다고 함부로 까불어선 안 된다. 반대로 지금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 완전히 망한 것 같다가도 갑자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방구석에 앉아 세상만을 탓하며 한숨만 쉬고 있지 마라. 언젠가 나에게 찾아올 나만의 기회를 인내하며 기다려라.       

새옹지마, 변방 늙은이의 말이란 뜻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중국의 어느 변방에 늙은 노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인이 평생을 애지중지 하며 기르던 애마가 그만 도망을 가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위로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노인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집을 나갔던 노인의 말이 아주 뛰어난 품종의 암컷 말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자 이번엔 사람들이 너무나 기쁜 일이라며 노인을 축하했다. 이번에도 노인은 그저 웃으며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어느 날은 노인의 아들이 야생 암컷 말을 길들이기 위해 말을 타다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아들의 일을 두고 노인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노인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혹시 압니까? 언젠가 이 일이 복이 될 지도요.’라며 의미 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중국은 큰 전쟁에 휘말렸다. 병사가 부족했던 나라에서는 지방 곳곳에서 청년들을 전쟁터의 병사로 뽑아갔다. 하지만 다리를 절었던 노인의 아들은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징집을 피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30대라면 우리 인생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이야기해주는 이 옛 격언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먼 이야기 같지 않아야 한다.

 내 주변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30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어느 정도 인생이라는 데이터를 쌓아온 시간이다. 이제는 그 30년이라는 데이터를 토대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데이터를 통해 인생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니 지금만 보고 함부로 까불지 마라. 인생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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