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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May 06. 2018

그 여자들

<레이디 버드>와 <소공녀>

어떤 우연인지, 문득 극장을 찾고 싶어진 날은 5일이었다. 4월 5일엔 <레이디 버드>를 보러갔고, 5월 5일엔 ‘아직 <소공녀>를 상영하는 곳이 있을까...’하다가 동네 극장에 아직 걸렸다기에 빠르게 예매 버튼을 눌렀다.


두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봤다. ‘<레이디 버드>가 자라면 <소공녀>가 될까?’ 집을, 동네를 벗어나지 못해 안달인, 부모가 준 이름마저 거부하는 ‘크리스틴’(일명 레이디 버드)이 뉴욕에서 좌충우돌을 겪고나면 ‘미소’처럼 될까? “내가 집이 없지, 취향과 생각이 없는 건 아냐.”라고 말하는 미소가? 글쎄... 미국에선 보증금 비싼 방엔 보증금 걱정, 보증금 없는 방엔 이런 곳에 사람이 살기는 했을까 싶을 만큼 방 가득 핀 곰팡이와 전기, 가스는 들어오나 등등 기본 옵션이라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걱정할 필욘 없지 않을까. 안 살아봐서 모르겠다.


<레이디 버드>와 <소공녀> 모두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레이디 버드>에서 크리스틴이 고향을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 엄마와 지지고볶고 싸우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엄마가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줬으면 바라는 마음은 많은 딸들이 품었을 법하다.


크리스틴 또는 어떤 딸들은 ‘엄마는 나를 미워하는 거 같아.’라는 슬픈 생각과 함께 자란다. 그리고 타지 생활이라는, 성년이라는 다음 단계에 건너가서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꿈을 꾸고 좌절하고 이루고 하는 퀘스트들을 깨가면서 삐뚫어졌던 어린 날을 되돌아보거나, 여전히 그대로 머물러있으며 늘 누군가를 탓하거나 한다.


<소공녀>의 미소는 돈보다, 남들처럼 안정감 있게 사는 삶보다, 취향을 중시하는 현대의 사람상 중 하나다. 무척이나 현대적인 캐릭터다. 그렇지만 쉽게 미소에 공감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미소가 참 의연한 여자기 때문에.날 때부터 당당하고 미소가 참 예뻤을 것처럼 매사에 의연하고 멋지다. 이런 의연함과 당당함이 위스키와 담배를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미소를 미소답게 한다.


그녀는 위스키와 담배를 사랑해서 집을 뺀다. 집세가 5만원 오르고, 담뱃값이 2000원 올랐기 때문에 가사도우미로 버는 돈은 차떼고 포떼면 마이너스다. 그런 상황에서 A라면 담배를 끊을 거고 B는 위스키를 소주로 바꿀 거고 C는 일을 악착같이 늘릴지도 모르고, D는 집을 뺀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미소의 선택도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다.

미소는 대학 시절(이마저도 등록금이 없어 중퇴했다고 나온다) 함께 밴드에서 활동했던 친구들을 찾아가는데, 친구들은 비록 집이 있고 쌀이 있어도 어느 하나 미소보다 사는 게 나아보이진 않다.


점심시간에 회사 휴게실에서 수액을 맞는 친구, 결혼 몇 개월 만에 갈라서기로 하고 술과 눈물로 밤을 보내는 친구, 종일 집안일에 매여있는 친구 등등. 그런데도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난 미소에게 방 한 켠을 빌려주면서 미소의 생활이 ‘스탠다드는 아닌 방식’이라거나, 살 곳을 줄테니 연애는 남자친구랑 하고 결혼은 자기랑 하자거나, 담배랑 위스키를 포기하면 되지 친구집에서 사는 건 민폐가 아니냐며 미소를 판단하고, 무례한 제안을 장난처럼 던진다. 잠을 재워주면 이런 참견을 할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걸까?


영화에서 좋았던 부분은, 미소가 절대 이런 이야기에 자세를 낮추고 침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소는 언성을 높여 화내지는 않지만 단단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내가 집이 없는 거지, 생각과 취향은 있다”고. 또 보증금할 돈을 모을 동안 친구 집에서 지내는 걸 민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그녀가 친구를 재워줘야 하는 입장이라도 몇 밤을 자고 가든 괘념치 않기 때문이라고.


미소를 지켜보다보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에 치여 사는 친구에게 ‘대단하다’, ‘참 힘들었겠다’며 응원과 위로를 건네고, 지금은 비록 멋 없게 살고 있더라도 과거의 너는 ‘참 멋졌다’고 기를 살려주는 미소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표정에도 말 마디에도 진심이란 걸 가득 담았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극장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동안, 크리스틴은 과거를 상기시켰고, 미소는 미래를 그리게 했다. 비록 크리스틴처럼 철없이 누군가를 상처받게하고 뒤늦은 후회를 삼키지만, 미소처럼 내 몸 뉘일 방 한 평이, 밥 지을 쌀이 없어도 멋은 있게, 생각과 취향을 숨기지 않고 그에 당당하게 살기를.



P.S 여기는 사족 :

4월에서 5월로 건너오며 여러 선택을 했다. 늘 후회는 없다. 하나의 선택을 할 땐 거기에 단단히 꽂혀있던 거니까. 저번 날에는 “훗날 이 시간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아님 말까? 싶지만 솔직히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고 썼다. 지금에 와선 맞다고 끄덕인다. 너는 그날들을 사랑했다고 최선을 다해 내게 말해주는 중이다. 사랑했기에 많이 슬펐고, 울었고, 지금에와서 이렇게 돌아볼 수도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일기에 또 쓴다. “의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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