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탠바이 웬디>
<스탠바이 웬디>는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그렇지만, 평소 실수가 잦고 미숙한 아이들은 더더욱 네 날개로 날아보라고 등을 떠밀어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부모님이고 선생님이고 시도하는 아이들이 팔을 채 다 뻗기도 전에 그 손을 낚아채거나 등 뒤에서 불안한 눈동자, 주름 잡힌 미간을 숨기지 않기 일쑤다. 그럼 아이들은 위축되고, 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사실 어릴 땐 시행착오 과정이 더욱 중요한데도) 일을 그르친다. 그럼 곧바로 훈수 두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지. 내가 해줄게.”
웬디는 스타트렉 시리즈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는 덕후. 스타트렉 팬 시나리오 공모전에 참가하기 위해 기나긴 시나리오를 쓸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하고 빵집에서 알바도 한다. 웬디는 자폐증이 있다. 사람과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고 땅을 바라보거나 대화보다 기계적으로 응답하는 느낌을 주는 정도인데, 이것이 그가 자유롭지 못하도록 막는 족쇄가 된다.
글쓰기를 정말 좋아하는 웬디는 쓰고 싶을 때 쓰지도 못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알바, 청소 등 규칙을 따라야 하는 센터 생활이 답답하지만, 웬디의 유일한 가족인 언니는 웬디를 집에 데려오기를 주저한다. 이제 막 아기를 낳았기 때문. 혹여나 통제 불가한 웬디 때문에 아기에게 해가 갈까 불안해 웬디를 집에 데려갈 수도, 아기를 보여줄 수도 없다. 언니가 잠깐 센터에 온 날, 웬디는 자기는 괜찮다고, 충분히 좋은 이모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흥분한 탓에 발작적인 반응을 보인다. 센터장은 “Stand by”를 외치며 그를 주저앉게 한다.
웬디는 안다. 사람들이 기회를 줄 때까지, 웬디를 믿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 웬디가 세상 밖으로 나와 혼자만의 여정을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 언니와의 사건 이후 방에 틀어박혀 울다가 스타트렉 공모전에 투고할 시나리오 우편 발송 데드라인을 넘기고 만 것! 웬디는 직접 LA의 파라마운트사를 찾아갈 결심을 한다. 머뭇거림은 없다. 그녀는 ‘직진 소녀’니까. 뒤를 졸졸 따라오는 귀여운 강아지 피트와 함께 긴 여정에 오른다.
순진한 웬디를 등쳐먹으려 하는 사람들 일색이다. 보는 사람이 콩닥콩닥 해지는 몇 순간을 거쳐 초코바 한 봉지가 몇 만 원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슈퍼마켓 주인에게 대신 호통을 쳐준 할머니와 동행을 하게 되는데. 그만 운전수가 졸음운전을 한 탓에 깨나 보니 병원에 와있다. 여기서부턴 어찌어찌 뒤따라 온 언니와 센터장에게 잡히지 않으려 도망하는 신세까지 추가되어 개와 시나리오를 꼭 붙잡고 탈주극이 벌어진다.
브런치가 쓰는 플랫폼이라 이 영화를 선택했을까. 브런치에서 제공하는 시사 기회로 본 영화에는 ‘쓰는 사람’에 대한 강한 자의식과 또 그 노고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시나리오를 반쯤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지다가도 씩씩하게 머릿속 이야기를 다시 종이에 옮겨 적는 웬디, 사람 눈을 보는 것도 힘들어하는 웬디가 ‘글 한 편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고 호소하듯 말할 때 절로 눈물이 삐죽 나왔다.
사실 영화를 보는 중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웬디가 병원에서 언니에게 잡혔다면? 아마 편하게 언니 차를 타고 LA에 가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온 것도 잘했다’는 약간의 칭찬과 함께. 그렇지만 웬디가 끝까지 도망을 쳐서, LA까지 혼자의 힘으로 달려가서 좋았다.
그러니까 웬디가 병원에서 도망치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것, 누구를 믿을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알 길 없는 수상한 도시의 길바닥에 홀로 서면서도 하고 싶었던 건, 파라마운트사에 시나리오를 제출하는 것 이상으로 혼자서, 제 힘으로 (남들이 못할 거라 생각하는)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게 아니었을까.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언니, 센터장을 비롯한 세상에 당당히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일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믿음은 중요하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넌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씩씩하게 해낼 수 있기도 하니까.
사랑한다면, 믿어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