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
<변산>은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쇼미더머니' 6년 개근 참가자 학수(a.k.a 심뻑)는 1차 오디션 통과 후 우연히 고향 친구들과 길에서 맞닥뜨린다. 밥을 먹으며 그만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친구들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데 지역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건 곳은 고향 변산의 모 병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것. 노름에 빠져 어머니 임종 때도 경찰 수배로 장례식에 없었던 조폭 아버지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마음이 움직일 리 없다. 끊으려는 찰나,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 목소리가 학수에게 거친 말을 쏟아붓는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 학수는 고향으로 내려간다. 성인이 되며 영영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질기게도 그를 놓아주질 않는 고향 '변산'으로.
아프다던 아버지는 생각보다 멀쩡하다. 병원복을 입고 술과 노름을 즐기는 한심하고 여전한 모습으로 학수의 분통을 터뜨린다. 얼른 서울로 돌아가려 하지만, 학수의 귀경은 자꾸 늦춰진다. 과거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자를 쓴 모습이 수배 전단과 유사하다는 허술한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 가고, 조폭이 된 옛 친구 용대에게 부려지며 고향에 눌러 붙는다.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이제 와서 미안하다 말하면 된 거냐고 적대심을 강하게 표출하지만, 반대로 돈을 뺏고 살아있는 문어를 용대 얼굴에 붙이며 시시덕대던 자기 모습은 '옛 일' 치부하는 학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지우지 못해 자꾸 악을 쓰면서, 어릴 때 실수했던 일을 자꾸 이야기하는 용대는 귀찮다고 생각한다.
학수 옆엔 계속해서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선미가 있다. 전화해 변산으로 부른 것도, 첫사랑 학수에게 먼저 애정을 표하는 것도, 무심한 학수가 어릴 때 좋아하던 미경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상처받는 것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극복하길 바래서 직구를 날리는 것도 다 선미의 일이다. 답답한 상황에 자꾸 빠지는 학수에게 선미는 말한다. "넌 정면을 못 봐. 네 아버지와 똑같아."
돌직구를 기점으로 학수는 그전까지 귀찮다고만 생각했던 선미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틈틈이 글을 쓰는 선미에게 "문학소녀네."라고 말을 붙이자, 선미는 "이제 문학소녀 아니거든."이라며 제 이름 세 자가 당당한 책을 한 권 툭 내민다. 묵묵히 써온 글을 세상에 내고 어엿한 작가로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것.
저만 힘들고 저만 분해서 자꾸만 화를 참지 못하는 학수보다 제 방식으로 내면을 닦고 재주를 갈아오며 이제 학수를 이끌어주는 당당한 선미가 통쾌했다. 내 주위엔 떠나는 사람이 돌아오는 사람보다 많지만 선미처럼 제 자리에서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내가 그리는 고향의 이미지가 변할 수 변할 수 있을까 궁금증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선미는 외적으로 아름다운 미경보다 관심과 호의를 덜 받고 거기에 씁쓸해한다. 이 모습은 배우 김고은의 증량과 다이어트에 대한 이슈가 영화의 알맹이보다 큰 관심을 받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선미에게서 답답한 남자를 사랑해주고, 용기를 주고, 이끌어주는 헌신적인 여자의 스테레오 타입이 엿보여 아쉽기도 했다.
내 고향은 폐향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선미는 이야기한다. 중학생 때 학수가 쓴 위의 시를 읽고 노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고, 이젠 자칭 '노을 마니아'라는 작가가 되었다고. 좁고, 지겹고, 시시콜콜하고, 구차하고, 허술하고, 아버지가 있고, 그래서 부정하고 싶은 변산. 곧 학수의 과거는 선미로 말미암아 노을 보기를 좋아했고, 시 쓰기를 좋아했던 과거의 괜찮았던 순간들로 노을 번지듯 플래시백 된다. 그리고 때로 지나칠 만큼의 웃음과 해학이 있고, 학수의 일이라면 제 일처럼 신경 써주는 친구들이 있는 현재로 돌아온다.
과거의 상처에서 끝없이 연성되는 자기 연민은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아버지에 덤비고 용대에게 맞짱을 신청하는 학수. 서울로 돌아와 펼치는 <쇼미더머니> 무대에서 헐뜯고 욕하지 않는 그의 가사는 분명 전과 다르다.
고향이 마냥 푸근하고 온정 넘치는 곳이 아니라 찌질한 과거와 상처가 뒤섞인 애증의 장소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겐 변산과 내 고향을 오버랩하며 영화에서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