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테이블>
배우가 된 여자와 회사원이 된 남자. 한때 달콤했던 추억 속 연인이었을 남자는 지루해진 현재에 '모 배우와 사귀었던 사이다'하는 무용담 하나쯤 남기려는 듯 인증샷을 요구한다. 시시껄렁한 찌라시만 읊어대 더이상 즐겁지 않은 대화와 무리한 요구에 적당히 응해주고 자리를 떠나는 그녀.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남자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면서도 티나지 않게 "그래." 라고 답하는 장면에 나는 손을 꽉 쥐었다폈다. 지루한 대화와 무례한 부탁을 참아주는 일은 피곤하다. 아름다운 추억을 추억 그대로 남기는 일은 더 힘들다.
남자와 여자가 세 번쯤 만나고, 남자는 돌연 여행을 떠났다. 그 사이 여자는 이직을 했다. 음식에 관한 잡지를 만드는 일은 돈은 못벌고 바쁘지만 재밌단다. 돈, 명예, 재미, 의미... 직업에서 한 가지라도 찾으면 다행이라는데 여자는 재미와 의미를 찾은 듯하다. 여자는 좀처럼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한다. 오가지 못하는 눈빛처럼 돌던 대화가 마음을 표현하면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여자는 홀연히 여행을 떠나버린 그가 야속했고, 남자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주제에 '그래도 되나' 싶어 연락도 못하고 여행 내내 그녀를 생각했다. 체코에서 산 태엽달린 시계를 손수 그녀의 손목에 채워주면서, 자질구레한 선물들을 자랑하듯 펼쳐보이면서, 여행을 하면서도 잊지 못했던 그의 마음이 활짝 표현된다.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고 활짝 웃는다.
사랑의 표현은 어렵다.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사랑의 감정도 직관적이지만, 음식을 맛있게 느끼도록 표현하는 글이 어렵듯이 당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앞에 놓인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도 먹지 않고 카페를 나선 두 남녀의 뒷모습은 초콜릿보다 달달하다.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사기 결혼 경험이 꽤 있는 그녀가 또 한 번의 '작업'을 준비하던 사장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과 사랑에 빠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는 처음으로 진짜 결혼을 준비한다. 그리고 역시 가짜 결혼에 빠삭한 '엄마 대행' 여인에게 진짜 엄마의 이름을 붙여준다. 공교롭게 그녀의 결혼식은 여인의 죽은 딸이 결혼했던 날과 같은 날짜. 사무적이던 눈이 애틋함에 가득찬다. 여인이 갔던 길이 앞으로 그녀가 갈 길인지도 모른다. 결혼식은 여러 번 치러봤어도 진짜 결혼식은 처음인 그녀와, 엄마 역할을 여러 번 해봤어도 친엄마의 마음으로 가는 결혼식은 처음인 여인. "우리 거북이"하고 그녀의 어릴 적 별명을 부르는 연습을 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진짜보다 진심처럼 들린다. 이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가짜지만 진짜고, 그보다 진심이다.
결혼을 앞둔 그녀와 아직 그녀를 못잊은 그. 돈 많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건 그녀인데 자꾸 뒤돌아보는 것도 그녀다.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왜 다른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는 그녀. 그에게 대놓고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나자고 마음을 떠보는 그녀는 당차다. 그리고 제안을 거절하는 그의 표정은 그녀보다 아쉬워보여 답답하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없는 그를 참지 못해 미래를 약속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나와 그는 사실 어젯밤 꿈에 그녀가 나왔다고 고백한다.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가는 두 사람. 그녀는 더이상 돌아보지 않을 것이고 그는 여러 번 그녀 가는 길을 돌아볼 것만 같다.
두 사람과 한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음료와 꽃 한 송이. 카페의 흔한 풍경, 흔한 대화 안에는 여러 결의 감정과 관계가 숨어있다. 영화를 보고 커피머신 뒷편에 앉아 손님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봤다. 전에 없던 미묘함이 테이블 위로 엿보였다.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운동을 반복하는 이야기와 마음들. 오늘도 카페는 내가 모르던 세계를 슬쩍 열어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