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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Aug 29. 2018

<삼삼한 이야기> 그 190번째 끈

사람

01 커피와 후광

알바 출근 직전, 편의점에서 즉석 커피를 사는 중이었다. 먼저 결제를 하고, 얼음컵을 기계에 놓고, 커피 추출 버튼을 누르면 끝!이다. 그런데 삐끗했다. 생각 없이 'L(Large)' 버튼을 눌렀는데 아뿔싸, 누르고나서야 바로 아래 'XL' 버튼이 보였다. 육성으로 "어머."하고 단말마가 튀어나왔고, 알바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니 제가 XL을 눌러야 하는데....구구절절"

알바분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나는 괜히 미안하고 민망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데 이 의욕적인 알바 분은 당황한 손님 나부랭이를 구해주기 위해 비장하게 나섰다. 이미 내 얼음컵은 작은 사이즈 커피로 반쯤 차 있기 때문에 그대로 XL버튼을 누르면 컵이 넘친다. 그러니까 작은 컵을 하나 꺼내서 일단 먼저 나오는 물을 받으면서 타이밍을 재다가 시꺼먼 에스프레소가 추출될 즈음에 가서 원래 큰 컵으로 바꿔치기를 하겠단 것!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좀 어려웠다. 다소 어려워 보였다. 달리 뭘 할 수 없었던 나는 걱정스런 눈을 하고 뒤에 서 있었다. 상냥한 그 분이 요리조리 컵을 움직인 결과, 커피가 되살아났고, 알바분은 살짝 의기양양하게 "여기요!"하고 컵을 내밀었다.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대로 난 "고맙습니다!!" 외치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커피는 의외로 맛있었다.



02 밥의 유혹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다. (현재 진행형) 고로 학원을 쨌다. 지금 중요한 건 학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천둥번개와 폭우를 기억하는 것. 뻔뻔하게 나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김치나베를 시켰다.

'비 오는 날은 국물이야.' 열심히 혼밥을 하다 보니 대각선 테이블에 앉은 청년 둘이 나와 같은 메뉴를 시키고 있었다. '내가 먹는 게 맛있어 보였나 보네.'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먹었다.

그러다 목이 말라서 "사장님, 물 좀 주세요~"했더니 사장님이 아주 시원해보이는, 얼음 동동 물병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곤 말했다. "밥 좀 줄까요?"

"네?"

나는 사장님이 내가 배가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데서 다소 당황했다.

사장님이 재차 말했다.

"딱 거의 다 먹었을 때쯤 밥 말아 먹으면 맛있어요. (주먹을 보이며) 딱 요만큼만 줄게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네..."

주먹만한 밥덩이가 왔고, 그마저 김치나베 국물에 쓱쓱 말아 먹었다.

기분 좋게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사장님이 말했다.

"역시 밥을 조금 마는 게 좋아요. 그쵸?"

웃음이 터진 나는 맞장구를 치며 "잘 먹었습니다." 하고 가게문을 나섰다.

비가 여전히 주루룩주루룩 쏟아지고 있었다.



03 멋진 교훈

근래 어떤 사람에게서 불쾌한 말을 몇 가지 들었다. 그리고 고민에 휩싸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꽤 친절하고 매너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지하고 무감하게 불쾌한 말을 던질 수가 있담.

아무리 본인은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가 아니었고, 뭘 몰랐고,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수치와 분노에 대해 1도 모른다고 해도. 그런 걸 내가 이해해줄 필요는 없었다. 기분이 찝찝할 따름이었다.


사람의 두 얼굴이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방어적인 태도가 튀어나왔다. 싸늘한 말을 던졌다. '저 사람도 못 믿어.', '저 사람이라고 다를까?' 하는 불신. 내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의식에 찌든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다 오늘 하루에 저 두 사람을 만났다. 스쳐 지나가면서도 좋은 느낌을 가득 선사해준 두 사람 덕분에 오늘 하루가 좋게 기억될 듯하다. 방어도 방어지만 나다움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 것. 저 두 사람이 준 가장 멋진 교훈이다.

비가 기분 좋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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