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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Nov 17. 2018

01 : 첫인상과 타이베이현대미술관

잔잔한 듯 뜨겁게, 타이베이

김포에서 뜬 비행기가 타이베이 송산공항에 내렸다.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고 스마트폰을 껐다 켰다. 12시였다. 11시에 이륙했는데 시차 덕에 1시간을 벌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주위는 시끌벅적했고 나는 서두를 게 없었다.

언니는 근무를 마치고 밤 비행기를 타고 늦게 도착할 예정이었고 낮 12시부터 밤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숙소에 체크인하고 처음 만난 도시의 첫인상을 확인하는 것 정도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유심을 샀다. 공항을 나서면서 지하철 앱을 다운받았다. 유심도 샀고, 앱도 있고, 미리 알아본 대로 지하철 역사 안에서 손짓 발짓으로 교통카드인 이지카드 구입과 충전까지 완료. 두려울 게 없었다. ‘이제 프로여행자쯤 된 거 아냐?’ 하는 자뻑에 취해서 플랫폼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익숙해질 용산사역.

타이베이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과는 다른 구조로 좌석이 기차처럼 마주보는 것도, 일자로 늘어서 있기도 했다. 그곳에 앉은 타이베이 사람들은 타이베이를 소개하는 책에서 읽은 바대로 참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에서는 사람들 옷 구경만 해도 꽤 재미있는데 여기는 차림새가 고만고만했다. 그것은 곧 피로함이 덜하다는 장점이기도 했다. 시각적으로는 물론이고 큰 소리로 떠들거나 옆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서울과 다른 점 찾기를 하다 보니 금세 숙소가 있는 용산사역에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급하게 내리다 어깨나 팔이 닿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이곳에서는 조금만 몸이 닿아도 금방 사과를 했다. 서울에 살다 보니 사과를 받는 게 더 안 익숙한 나는 무엇이 당연한 건지 헷갈리는구나 하고 잠깐 슬펐다. 

하지만 덕분에 타이베이의 첫인상 점수가 올라갔다. 길을 찾아가는데 하늘이 예뻤다. 뭉게뭉게한 흰 구름이 가득했다. 숙소에 가서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고 웰컴과자를 먹으며 춤을 췄다. 그리고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기 진짜 좋아!


잠깐 널브러져 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싶어 벌떡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구글맵에 표시해둔 장소를 보다가 언니가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고, 혼자 가도 좋을 곳으로 향했다. 중산역에 위치한 '대만 현대미술관'이었다.

중산역부터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길에는 귀여운 동물 조각들이 많았다.
타이베이 현대미술관의 외관. 붉은 벽돌이 예뻤다..
Museum of Contemporary Art Taipei, 줄여서 MOCA.

대만 현대미술관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옛 건물 분위기가 멋진 곳이었다. 50NTD, 2천 원쯤 하는 입장권을 사고 미술관에 들어서니 전시가 한창이었다. “The Charismatic Rebirth of Yore(카리스마 있는 과거의 부활).”라는 주제로 여러 관이 각기 다른 작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전통과 현대, 공예와 디자인,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등의 경계 짓기에서 자유롭기 위한 예술이 이 특별 전시의 주제인 듯했다.


전시실은 말 그대로 교실 같았다. 붉은 벽돌 건물에 내부 역시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등장하는 교실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주제별로 전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정신 사납지 않고 집중하기 좋았다. 


나는 ‘White Ocean(하얀 바다)’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공간을 바닷속처럼 꾸며놓고 투명한 유리 구슬을 통해 전시관 내부 위아래를 반전해서 구경하는 게 포인트였는데, 푸른 전시관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 공간에 있던 모두가 신이 나서 유리 구슬을 여기저기 갖다 대고 사진을 찍었다. 나도 감탄사를 내뱉고 셔터를 여러 번 누르고 내가 있는 사진을 가지고 싶어서 재빨리 옆에 사진을 부탁했다. 꽤 어려 보이는 두 사람이 사진을 찍어주고 서툰 영어로 홍콩 사람이냐고 물었다.

전시관마다 뭐가 있을까 기대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White Ocean 전시.

“(나 홍콩인 같나…?) 아니, 나 한국인이야~.” 하니까 그렇냐며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나는 내가 들을 법한 질문을 역으로 먼저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두 사람은 미술관에 자주 다니는데 입장료가 저렴해서 현대미술관도 자주 구경하러 온다고 했다. 바람직한 청년들이었다. 이왕 시작한 대화,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소통의 벽이 있었다. 말이 아니라 느낌만 알아듣는 기분…. 친구들이 야시장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곧 언니가 올 거라고 거절했다.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뺏기기 싫었다. 밤부터 며칠간 쭉 언니와 동행할 거니까 혼자만의 에너지를 채워야 맞장구도 더 잘 치고 일하는 언니의 하소연도 더 잘 들어줄 것이 아닌가. 는 실은 지금 와서 덧붙이는 핑계고 사실 그런 건 첫인상이 결정한다.

 

겉모습뿐이 아니라 대화든 눈빛이든 분위기든 유머든 뉘앙스든 어디 사소한 구석에서라도 영 흥미가 생기지 않을 때 내 첫인상 점수는 짜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잘 붙잡던 나는 점점 더 오는 사람 잘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다. 야박해진 걸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분명해진 내 기준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을 판단할 줄 알게 된 거라 생각한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각나던 미술관 복도.

길치답게 미술관에서 나오자마자 길을 잃어 한 거리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고서야 갈 길을 찾았다. 그런 고생이야 늘상 있는 일이니까 버블티 한 잔으로 또 다시 기분을 좋게 만드는 나였다. 


대만은 날씨가 덥고 습해 자꾸 찬 음료를 찾게 되었다. 왜 버블티 가게가 그렇게 많은지 알 것도 같았다. 언니가 오면 같이 먹을 주전부리를 사고 숙소 근처를 좀 파악하니 어느새 해가 다 졌다.


에어컨이 있는 쾌적한 숙소로 돌아가 또 나홀로 춤을 추다가 만다린어 일색인 대만 텔레비전을 열심히 돌려서 그나마 영어로 나오는 채널을 찾았다. <겟 아웃>이 방영 중이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신경을 건드리는 공포영화 때문인지 닭살이 돋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언니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이제 탑승할 거라고 말하는 얼굴이 아주 지쳐 보였다. 도착하면 얼른 택시 타고 오라고 말하고 끊는데 새삼 짠했다. 일 끝나고 공항 가서 수속 밟고 2시간 비행하고 여기까지 택시 타고 오면 자정이 다 될 거였다. 

백수는 이렇게 놀고먹고 살 판 났는데.... 하지만 죄책감은 백수의 가장 큰 적. '내가 언니의 가이드가 될 텐데 뭘.' 하고 도착 카톡을 받고 1층부터 에스코트해 모셔 왔다. 3월에 마산에서 보고 장장 4개월 만에 대만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얼굴을 보니 그게 뭐 대순가 싶었다. 이렇게 따로 또 같이 얼굴 보고 살면 되지.

편의점에서 일본 음료를 많이 팔더라. 하이볼 최고!

산토리 하이볼 캔과 ‘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달달한 맛의 대만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일상의 푸념을 들어주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정오부터 하루 종일 버스 투어를 다녀야 하니까 천천히 일어나자고 했는데 우리는 호텔을 알차게 써먹겠다고 둘 다 9시에 재깍 일어나 눈도 안 비비고 수영을 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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