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시 읽었다. 동화에 이렇게 많은 은유와 암시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했다. 어릴 때부터 앨리스 동화를 좋아했다. 당돌한 소녀 앨리스와 이상하지만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만드는 이 색색의 동화는 '어쩐지' 다른 동화들보다 그로테스크했고 따라서 매력적이었다.
그 뭐라 명명할 수 없는 '어쩐지'의 느낌은 이제 와장창 깨졌다. 신비로웠던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 하지만 이 짧은 동화에 압축되어 있던 여러 층의 의미를 걷어내고 보니 동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느낌이다. 작가 루이스 캐럴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앨리스라는 인물은 이제 수없이 많은 부분에 비유,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앨리스를 파랗고 하얀 옷을 입은 금발머리 소녀로만 규정할 수 없다.
원더랜드는 현실의 어떤 단면을 포착하고 있는지, 거기서 나타나는 정치적 풍자, 무의미한 언어 유희들이 의미를 갖는지, 앨리스의 모험이 정말 성장으로 귀결되는지, 아니면 한낱 꿈에 불과했던 건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많은 함의를 품고 있는 텍스트다. 이것을 읽어내는 건 독자의 몫이다. 루이스 캐럴은 당시 교훈을 주 목적으로 삼던 빅토리아 시대의 아동 문학 경향에 반기를 들었다. 이 동화에는 아무 의미도 교훈도 없고 오직 재미를 위한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손에 들렸을 때부터, 그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의미 없다. 문학의 의도가 그 작품을 읽는 독자 백 명에게 다 똑같이 전달된다면 그건 문학이 아니라 어떤 지침을 담은 경구에 불과할 것이다. 고로 앨리스는 해석되어야 한다.
캐럴이 앨리스 리델이라는 소녀를 위해 아주 재미있기만 한 동화를 썼대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나무는 가지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모양이 보인다.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원더랜드는 시계 보는 토끼를 따라가고 물약을 마시는 등 수동적이던 앨리스가 여왕에게 저항하고 자기의 목소리를 내면서 주도적으로 변해가는 공간이다. 또한, 원더랜드는 인간 세계로 돌아올 앨리스가 이 세계가 바라는 방식을 인식하고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장소이기도 하다. 앨리스는 단순한 판타지 동화는 아니다. 읽을수록 멋모르고 좋아했던 동심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텍스트다.
하지만 다시 읽은 앨리스에서도 나는 내가 좋아해마지않던 '최애' 앨리스를 저버릴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의 꿈에서 깨 현실로 돌아오는 상황을 우려하기도 했다. 앨리스가 아무리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고 해도 한낮의 꿈에 지나지 않는 원더랜드를 결국 잊을 것이기 때문에 원더랜드는 꿈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오래 좋아해왔던 이 동화를 조금 더 긍정해보려고 한다. 종종 강렬한 꿈의 잔상이 생각보다 오래 남고, 잔잔한 수면에 떠오른 파동이 생각보다 멀리 가듯이, 앨리스의 원더랜드도 예기치 못할 때, 잊을 만하면 떠올라 앨리스의 지난 날 중 가장 이상했지만, 가장 풍성했던 하루를 상기시켜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