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
You cannot find peace by avoiding life.
삶으로부터 도망친다고 평안에 도달할 수는 없어요.
영화 <디 아워스>의 버지니아는 말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놓고 우즈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곁에 붙어 앉아 나를 부둥켜안고 놓아주지 않던, 어느 때보다 차가웠던 겨울에 이 문장을 베껴 적어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오래 생각했다. 삶에서 도망친다 해도 결코 평안에는 도달할 수 없음을 알면서 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다 일찍 떠나는 결정을 내렸던 걸까. 그녀는 자신의 문장을 배반했던 걸까.
그때도 지금도 모르겠다.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랑했고 쓰고 지우고 쓰고 살았던 사람의 속내는 그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짐작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산다는 것, 쓰디쓴 삶을 견뎌내는 것이 수도의 길처럼 초월하고 경지에 도달하는 길을 약속하지는 않듯이, 소리 소문 없이 도착하는 아름다움과 일상의 신고라는 복합적인 삶의 선물을 포기하는 일 또한 견디는 일만큼이나 괴로운 일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볼 뿐이다.
오래 전에 산 김혜리 기자의 영화 평론집에 <디 아워스>에 대한 글이 들어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펜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소묘한 인물들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영매처럼 새로운 자아를 영접하고 스쳐가는 다른 영혼의 색에 붉게 푸르게 물든다.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사나이들은 그것을 정복해 못을 치고 싶어하지만, 그녀들은 떠다니며 스며들고 감싸면서 세상을 다 가지려 한다. 누군가를 그의 곁에 있는 타인들과 함께 서 있던 장소와 더불어 이해한다. 그녀들은 종을 대표하는 단수로서 나를 격려한다. 지금 여기 보이는 너는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너에 비해 하찮다고.”
지난 해 가을에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푹 빠져 있었다. 이 한 권의 소설을 그토록 열렬하게 읽었던 이유는 당시의 일기에도 썼듯이 책이 모호하고 흩어진 자아를 긍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좋아하고 당근을 싫어하는 단순한 취향 말고 특히 속성의 측면에서 난 계속 모호하다. 자기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하나씩 가지는 A,B,C,D가 다 혼재된 사람인 것 같다. 타인에 의해서는 그렇게 명확히 정리되는 성질들도 내 입으로 말하려 하면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래서 모순되는 여러 성질을 동시에 지니려는 클라리사에 공감했고 그녀를 통해 이해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2016년 가을 일기에서
나만 이런가 싶어 번민하는 일이 많은 때에 이 마음을 읽은 듯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다독여주는 글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또 엊그제에는 몇 년 전에 선물 받은 어느 멋진 분의 책을 책장에서 발견했다.
“언뜻 나와 아주 다른 생각을 갖고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꾸린 듯 보이는 사람의 글을 읽다가 나의 느낌, 혹은 생각에 완전히 부합하는 한 귀절을 만날 때 그와 나는 금세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변에서 친구를 얻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은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친구들을 이어주는 공중전화 같은 것이니까요. 또 혼자라는 느낌을 많이 갖는 사람일수록 자기 생각을 글로 써서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책은 친구 찾기의 한 방편이니까요.”
여기에도 바삐 밑줄을 긋고 일기장에 베껴 적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책이 우연하게 손이 갔던 이유는 이런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 어쩌면 문장으로나마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멋진 문장을 쓰는 사람들이 멋진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멋지고 진실한 문장을 쓰는 이들은 삶이 어떤 것인지 명확한 언어로 규정하려는 법이 없고, 매번 모르는 것과 처음인 것 투성이인 인생이 두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글을 통해, 사람과 사랑을 통해, 또 다른 매개를 함께 지니고 나아간다.
그이들이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문장을 읽고 환희와 질투를 동시에 느끼며, 더 정진하고자 (잠시나마) 마음을 먹는다. 이 사소한 루틴의 반복이 오늘을 또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