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한 Apr 14. 2017

나의 우주를 침범당한다 해도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내가 영화 포스터를 보고 상상하는 수준이란 참 단순하다. 따뜻한 파스텔톤 스틸컷과 제목에 사용된 단어 '그리스'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를 배합해 나온 상상의 결과물이라곤 "그리스 배경 로맨틱 코미디",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는 로맨스 무비". 꽤 영화를 많이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상상력이 빈곤하다. 영화를 보다가 헉 하고 놀랐던 적이 다반사인 걸 보면 '포스터 = 영화'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새 영화 포스터를 집어들면서 다시 빈곤한 상상력을 가동시킨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위플래시>를 볼 때 나를 덜덜 떨게 했던 선생 J.K 시몬스의 인자한(그럼에도 아직 그의 검은 아우라를 떨칠 수 없다) 미소와 모든 걸 초월한 목소리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질 때만은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사랑에 빠져 하나의 우주를 만드는 세 가지 사랑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사랑. 정치학을 공부하는 다프네와 시리아 난민 파리스.

첫 만남부터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두 사람의 사랑


어느 늦은 밤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한 다프네를 파리스가 구한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버스를 타는 다프네에게 창 밖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는 파리스.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다프네를 바라보는 파리스처럼 두 사람은 따뜻한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진실한 속마음을 전할 때는 서툰 서로의 언어로 말한다. 파리스는 그리스어로 사랑하지만 두렵다고 고백하고, 다프네는 시리아어로 사랑하니까, 너와 함께라면 좋다고 위로한다. 하지만 그리스 경제 위기와 빈곤의 화살을 난민에게 돌리는 다프네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막아선다.


이 젊은 사랑은 싱그럽지만 결코 영원할 수 없어 보여 위태롭다.



두 번째 사랑. 우울증 약을 먹는 지오르고와 그를 해고해야 하는 엘리제.

하룻밤의 사랑에서 인생의 바꾸는 사랑을 만난 두 사람

지오르고는 매일 같은 시간에 우울증 약을 챙겨먹는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도, 주말마다 온가족이 단란하게 식사를 해도, 경제위기와 가정의 불화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 그런 그의 앞에 엘리제가 나타난다. 이 스웨덴에서 온 아름다운 커리어 우먼은 하룻밤의 불장난 후 곤히 잠든 지오르고를 깨워 내보내는 완벽하게 냉정한 성미의 소유자이다. 우연히 만난 엘리제는 알고보니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지오르고가 다니는 회사를 구조조정하러 온 담당자였고 여기서부터 불행의 기운이 감지된다. 어느 날, 지오르고는 구조조정을 피해 자신을 지오르고의 부서로 전출시켜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한다. 결국 친구는 해고당하고 이튿 날 목을 매어 죽는다.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는 지오르고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한편, 엘리제는 해고 대상자 목록에서 지오르고의 이름을 발견한다.


이토록 무거운 사랑이 있을까.

하룻밤의 사랑처럼 가볍게 만나 구조조정이라는 무거운 선택지에서 번민하는 연인을 보는 마음이 함께 무거워져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간을 도구 취급하는 세상에서 사랑과 삶을 마주한 인간의 이야기는 참으로 인간답게, 자신을 속이지 않고 끝을 맺는다. 인간이라 사랑하고 사랑하니 인간이어라.



세 번째 사랑. 슈퍼마켓에 올 때 행복한 마리아와 매주 그녀를 만나고픈 세바스찬.

심야 슈퍼마켓 데이트의 즐거운 한 때

경제 위기로 궁핍해진 마리아의 장바구니는 가볍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한 외국인이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그의 장바구니는 무겁다. 그리고 독일인이다. 나는 이것밖에 못 샀는데, 당신은 뭘 이렇게 많이 샀는지. 당신들이 뺏어간 땅이 어쩌고 저쩌고. 그가 알아듣지 못할 그리스어로 말을 퍼부어도 그는 그저 미소짓는다.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이 이야기하는 표현이 좋아요." 미소 한 방으로 언어의 장벽은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세바스찬은 마리아에게 토마토를 선물한다.

"다음 주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이번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핀다.

  

'Second Chance'라는 부제가 붙은 이 에피소드는 장년의 사랑을 그린다. 딸은 난민 이민자와 사랑에 빠졌고 아들은 외도 중이며(마리아는 다프네와 지오르고의 엄마였다!), 슈퍼에서 물건을 살 돈이 없어 슬프고, 남편 몰래 방문을 걸어 잠그고서야 세바스찬이 선물한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세바스찬이 잡아주는 따뜻한 손이 두 번째 기회가 되어준다.





사랑을 말하는 영화는 많다. 오히려 사랑이 없는 영화를 찾는 게 더 힘들 터다. <나의 사랑 그리스>는 하고 많은 사랑 영화 중에서도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만나는 충돌같은 사랑. 그 여파로 가지고 있던 어떤 것을 잃고 기존의 삶은 흔들린다.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내가 포스터에서 기대했던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보다 더 로맨틱했던 이유는 첫째, 시리아의 내전을 피해 타국을 전전하는 난민, 구조조정 광풍에 떠는 가장, 사랑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는 황혼녘의 남녀라는 다양한 인간을 다뤘기 때문이다. '사랑해듀오'라 고백하는 사회에서 같은 인종, 비슷한 재력, 학력, 사회적 위치의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대학교수와 주부, 난민과 대학생처럼 이렇게도 다르지만 사랑에 빠지는 편이 더 사랑의 속성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둘째, 사랑에 빠진 인물들은 슬픔과 상실을 마주하면서도 결코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사랑 때문에 나의 우주를 뒤흔드는 시련과 좌절을 겪지만 사랑을 탓하지 않고, 나와 사랑에 빠져 같은 얼굴을 한 당신을 탓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로맨틱하다.


시련을 겪어 낸 수척한 얼굴로 다시금 '두 번째 기회' 같은 인생과 사랑에 발을 디디는 그들에게 행복만이 가득하길. 괜히 내 우주를 뒤흔들 사랑에 빠지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사랑 영화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념을 이기는 욕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