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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Jun 06. 2017

치즈 같은 사람들

영화 <꿈의 제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을 인생에 유일하게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 있다면 슬픔이다. 이 슬픔을 견디게 해주는 이가 단 한 명 존재하는데 그 사람은 곧 죽는다.

<꿈의 제인>의 나눠진 두 갈래 이야기에는 슬픔과 죽음이 모두 나타나는데, 한 쪽은 예쁜 꿈 같고 다른 한 쪽은 악몽 같다. 가출 소녀 '소현'과 그녀를 집에 들이는 가출팸 엄마 트랜스젠더 '제인', 그 집에 사는 또다른 소녀 '지수'. 두 갈래의 영화에는 분명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한 쪽 이야기는 견딜만했고, 결 다르게 전개되는 다른 한 쪽은 견디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소현이 가출한 이유와 성장 배경은 직접 언급된 적 없지만 엄마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회상 한 마디로는 결코 짐작되지 않을 만큼 소녀의 외로움은 깊은 듯하다. 소현은 떠돌다가 제인을 만난다. 제인은 소현을 결코 동정하지 않되, 위로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서로를 한 번씩 구해주는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하다. 가족이나 친구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끈끈한 무언가가 관통하고 있다. 소현의 없는 발가락을 보고 제인이 "그 발가락은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물었을 때, 마치 극본에 서술된 지문처럼 (다소 건조하게, 너의 발가락을 동정하는 건 아닌데 단지 너의 일부라 궁금하기 때문에 묻는 어조로) 부담없이 묻기는 쉽지 않다.

쓰여 있지 않지만 애정이 있고 이해가 엿보인다. 그래서 제인과 소현의 감출 수 없이 슬픈 얼굴에도 불구하고 종종 배려와 행복이 묻어 있어 예쁘다. 예쁜 꿈 같다. 깨지 않으면 좋을.


앞 부분에서는 제인은 실재하는 형태로 소현을 집에 들이고 인천의 클럽 '뉴월드'에서 노래하며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렇지만 뒷 부분에서는 소현이 편지를 쓰는 대상으로만 나타날 뿐 형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현의 관객은 제인이 소현의 상상 속 인물이 아닐까 추측하게 되는데, 무엇 하나 좋을 것 없는 가출의 현실에서 꿈만 같다고 느낄 만큼 충만한 위로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제인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하지만 미러볼을 들고 귀가하면서 전화통화를 하는 입으로는 미러볼을 훔쳐서 무얼 하냐고 새침하게 말하는 자세와 사뿐사뿐 비치볼을 들고 도망갈 때 웃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고고한 유머를 버리지 않아 더 멋스럽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3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이 이어지는데 행복은 요만큼 (모래를 한 소끔씩 뿌리며) 아주 조금 올까말까 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힘든 인생, 혼자 살아 뭐하겠어."


제인이 소현에게 건네는 말은 많지 않지만, 덤덤하게 와닿는 말이 참 많았다.


뒷 부분에는 제인을 대신한듯 지수가 등장한다. 앞 부분에선 제인의 가출팸 일원이었던 지수가 후반부에는 소현이 합류한 또 다른 가출팸의 신입으로 등장해 소현과는 일면식도 없는 인사를 나누는 걸 보면, 앞과 뒤는 둘 중 하나만 현실이거나 앞 뒤 모두 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제인은 소현의 상상 속 인물이었을까. 기대고 싶은 언니처럼 대찬 모습을 보여주는 지수가 사라지고, 소현은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제인을 상상해내게 된 걸까. 어느 쪽이든 소현에게는 제인처럼, 지수처럼 강인하게 인생을 지킬 줄 알고 그 힘으로 소현 또한 품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제인에게 편지를 쓰는 소현의 목소리에서 함께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이의 쓸쓸함이 묻어났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인생이 시시하고 적적하고 꿈 같다 느꼈다. 돈을 벌어서 집세를 내고 밥을 사먹었다. 하루하루가 금방 사라졌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몸짓들 속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치즈 같은 인생이다. 속에는 구멍이 송송 나 있어 휑하고, 곰팡내나게 진행 중인 발효는 평생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던 중 극장 좌석에 깊게 몸을 묻은 채로 만난 제인 언니는 이런 시시하고 불행한 인생에도 나 같은 사람이, 혹은 너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면 종종 살 만할 거라고 말했고, 소현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도 제인이나 지수 같은 멋진 동반자가 있다면 종종 행복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전해왔다.

적적함 때문에 친구 집에 이사할 계획이고 시시함 때문에 자꾸 신문을 읽고 창밖 세상을 걷지만, 앞으로도 이 친구들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갈 것을 안다. 그렇다면 이 친구들에겐 더 상냥하게, 핍박하는 사람들에겐 더 대차게 굴면서 살아내야지. 밤이 깜깜할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니까. 발효의 시간들을 지나보내면 치즈는 더 농익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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