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삼한 이야기> 그 107번째 끈

썼다 지웠다

by 수수한

01 써야 하는 것 : 영화 에세이 한 편, 영화 리뷰 한 편


내 브런치 서랍에는 여러 편의 종이 뭉치가 구겨져있다.

아래로 쭉 스크롤을 내렸더니 번뜩이는 상념이 날라갈라 서둘러 손을 놀렸던 어느 날, 앞이 까마득해 답답함이 가시지 않던 어느 어느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끝 마침표 없는 종이 몇 장이 촤라락 발 밑에 떨어졌다.


가장 최근 날에는 무얼 쓰려 했나.

간만에 즐겁게 본 영화를 꼭 내 브런치에 눌러 새기겠다고 시작했던 리뷰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덮었다.

개요를 끄적일 땐 꽤 괜찮은 글이 탄생할 줄 알았건만, 문장으로 낳아보니 별 거 없는 단순한 기록, 짧은 사유가 못내 부끄러웠다.

다시 펼쳐봐야할텐데. 종이 뭉치가 언제쯤 다시 펼쳐질까.



02 쓰고 있는 것 : 일기


시간이 아주 많았던 날들이 있었다. 매일매일 일기를 써댔다. '썼다'보다 격정적으로 '써댔다'.

생각이 하나씩 들어차 밤이 되면 감정과 상념으로 가득 찬 머리와 가슴을 비우기 위해 손에 쥐가 나게 썼다.

글쓰기는 휴지통 비우기 버튼을 클릭하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못해 옛 기억을 들추다보면 다시 화가 뻗치고 막막함에 무력해지지만

무어라도 써야 하루를 끝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 썼다.

요즘도 그렇게 일기를 쓴다.

펜이 움직이면 일기에 박제되는 기억처럼 모두 다 지나가라는 듯이.



03 읽는 사람 : 10명



쓰는 이 없는 책상에도 열 명이 다녀갔다.

쓰지 못하는 작가에게 10이라는 숫자는 고맙고 부끄러운 숫자다.

단 열 명.

평생 열 명을 위해 뭘 해 본 기억이 없건만,

열 명 앞에만 서도 실어증에 걸린 듯 말 없어지는 나지만,

이 열 명을 위해 내 목소리를 담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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