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삼한 이야기> 그 106번째 끈

그리운 것들

by 수수한

01 너


너와 나 사이를 오갔던 발자국과 많은 글씨와 말들이 희미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나는 새 발자국을 찍지 못하고 지난 번에 그랬던 것처럼 뒤돌아서지도 못해.

엉거주춤.

서서 들여다보는 네모난 창 속의 너는 참 행복해보이지. 인생을 잘 살아내는 것처럼 보이지.

이렇게 가만히 서있다보면, 내가 왜 이렇게 서있는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주저앉아 버릴까봐

이상한 몸의 모양을 기억하려 해.

이상한 글씨로, 슬펐던 지난 날의 기억으로.



02 무료함


미칠 듯한 무료함이 그립다.

하품을 쩍 하고 왓차를 뒤적거리고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다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삶의 의미라던가 나의 존재라던가 그런 심오한 고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립다.

어느 무료한 날, 가만히 대낮 놀이터에 앉아 있다보면 귀에 울리는 아이들 소리는 온데간데 없이 들리지 않고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인 나 하나만 고독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동시에 햇볕을 맞고 있고 적어도 오늘 밥 걱정은 안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싶어 너털웃음이 나고, 그와 동시에 이 무슨 이중인격인가, 이중인격은 차치하고 오중인격쯤일 것이다하고 착잡함과 걱정과 뿌듯함과 즐거움 같은 공존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뭉게뭉게 솟아났다.

말 시키면 대답하고, 일 주면 일 하는 지금의 나는 자판기 같다. 한 순간에 딱 하나의 감정씩만 느끼는 것이 보너스란 없는 얄짤없는 자판기 같다. 때론 돈을 먹어버렸는지 아무리 지폐를 넣고 윤활제를 발라도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는 것도 꼭.



03 시무룩하지 않은 나


아빠는 이렇게 보냈다.

"축 처져있지 말고."


잠깐 만난 아빠는 내가 처져 보였나보다.

낮에는 "밝고 걱정없고 건강해보이는" 인상을 지향한다만, 밤에는 나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와버렸던 건지,

진심을 들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딱히 미안하지도 고맙지도 그립지도 않았던 아빤데 지나치고 나니 괜히 눈물이 났다.

딱딱한 휴지로 몰래 눈물을 훔쳐냈다.

아마 여름감기는 이 때 심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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