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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Sep 19. 2021

삐삐, 낭만이 담긴 숫자 시

진정한 아름다움은 극한의 제약 속에서 탄생한다.

[출처] 그린포스트코리아

  (삐삐를 직접 사용했던 세대는 아니지만) 휴대폰 이전엔 삐삐라는 통신 기기가 있었다. 이 기기의 정식 명칭은 '무선 호출국용 선택 호출 수신장치'로, 호출이 오면 삐삐라는 소리로 알려준다고 해서 그 소리가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10자리 내외의 숫자만이 표시되는 이 조그만 기기는 현대인의 소통을 책임지는 과거의 스마트폰이었다. 


   그 당시에도 무선으로 통화를 할 수 있는 휴대전화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던 삐삐는 휴대폰 구입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의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음성 대신 숫자만 보낼 수 있고, 삐삐를 치면 답신을 받지 못한다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적응의 동물인 우리는 원하는 메시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삐삐 암호'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렇게 '숫자 10자리'라는 극도로 한정된 제약에서 현대인의 낭만이 꽃을 피웠다. 




 

 

  단테의 신곡을 원문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청각적으로든 시각적으로든 완벽한 운율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사시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그의 작품은 들리는 운율과 보이는 운율,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청각적 운율뿐만 아니라 눈으로 얻을 수 있는 시각적 운율을 모두 고려하며 '서사시'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삐삐에 삽입됐던 수많은 '암호' 속에서 서사시를 읽는 것 같은 경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삐삐는 한글과 영어, 그리고 숫자의 세계관으로 이뤄져 있다. 이 조합이 의미하는 바는 2가지 정도가 있을 것 같은데, 첫째, 이 3가지 기호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소통할 수 없다는 것과 둘째, 완벽한 소통과 운율을 위해 3가지 모두를 균등하게 고려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삐삐 암호가 위대한 이유는 때로는 한글의 발음을 숫자로 치환하고, 때로는 숫자의 모양을 알파벳의 모양으로 대입하며 다채로운 방식으로 암호를 구축해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정해진 양의 숫자를 사용해 만들어지는 단어 자체의 맥락과 이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모습을 모두 고려했다니. 짧은 메시지 속에 이런 엄청난 고민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삐삐 암호가 더 이상 숫자로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진정한 '시'의 요소들을 담고 있었다. 위의 설명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삐삐 암호를 예로 들어 접근해 보겠다.



981, 1254, 9977, 1010235

  가장 쉬운 예로, 숫자를 읽을 때 나는 소리를 통해 소통하려는 암호들이 있었다.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8282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는데, 삐삐 사용자들은 이런 단순한 예시를 넘어 오만가지 메시지를 암호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암호들로는 '981', '1254' 등이 있었는데, 이를 빠르게 발음하면 각각 '급한 일'과 '이리 와(=이리 오소)'가 된다. 


  그중 단연코 으뜸은 '9977'이었다. 구구칠칠, 이 네 자리의 숫자는 '구구절절할 얘기가 많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77을 절절로 표현하려는 접근 자체도 너무 귀여웠지만 10자리의 음절을 4자리의 숫자로 담아내려고 했던 치열한 고민들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비슷한 예로 '(당신을) 열렬히 사모합니다'라는 의미인 '1010235'가 있다. 




11010, 9090, 6616617

  삐삐 사용자들은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모양도 놓치지 않고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1010'을 꼽을 수 있다. 이 숫자를 옆으로 뉘여 세로로 읽어보면 어렴풋이 한 음절의 단어가 보인다. 바로 '흥'이다. 몇 개의 숫자들이 모여 만들어낸 모습으로 소통할 생각을 했다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만나고 있는 애인한테 귀엽게 토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때 '11010'이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있던 화도 풀릴 것만 같다. (반대로 삐삐를 치면 답장을 못 받는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11010'이라는 삐삐를 받은 이후부터 애인의 화를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하는 경우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삐삐 암호의 세계관은 한글과 숫자의 교집합뿐만이 아닌, 알파벳으로까지 세계관을 확장했다. 9090은 '가자', 즉 'go go'를 의미하는 암호다.  9를 자세히 보면  g와 모양이 유사하다. '가자'라는 의미의 암호를 만들기 위해 숫자와 알파벳의 시각적 모양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때로는 숫자에서 한글을 도출해 내고, 때로는 알파벳을 유추할 수 있도록 다양한 표현적 관점으로 접근했던 삐삐 세대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더 나아가 한글과 알파벳을 동시에 사용했던 암호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삐삐 쳐'라는 의미의 '6616617'라는 암호가 있다. 661661의 모양은 bblbbl로 치환되고, 이는 곧 삐삐를 의미한다. 거기에 숫자의 발음과 한글의 발음의 교집합을 활용해 7로 깔끔하게 표현했다. 



486, 1365244, 1126611

  여러 예시들을 들고 왔지만, 내 기준에서 시적 표현의 정점을 찍은 건 '486'이라는 암호였다. 윤하의 <비밀번호 486>이라는 노래 제목도 바로 이 암호를 오마주로 만들어졌다. 486을 재분해하면 사랑해라는 의미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사랑해'라는 음절의 획을 각각 세보면 4, 8, 6이 된다. 이를 한 단계 더 활용한 '012486'도 탄생했는데, 이는 '영원히 사랑해'를 의미한다. 사랑해에서 한 단계 꼬아 음절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삐삐 세대의 위트가 참 낭만적이라고 느껴졌다. 


  역시 위대한 아름다움은 사랑 속에 있듯이, 또 하나의 엄청난 시적 암호를 애정 표현에서 발견했다. '1365244', 언뜻 보면 아무 의미 없는 숫자들의 조합 같지만 '1' '365' '24' '4'로 각각 떼어 살펴보면 1년 365일 24시간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깊은 진심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1126611'. 나는 감히 이 숫자를 세상에서 두 번째로 존재하는 낭만적인 숫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숫자 자체는 아무 맥락 없는 나열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 마음속으로만 볼 수 있는 가운데 획을 그어보면 음절 3글자가 만들어진다. 바로 '사랑해'라는 글자다. 숫자와 한글이 만나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한 셈이다.







  "극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다." 내로라하는 디자인 서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장 중 하나다. "나는 너를 사랑해" 보다 음절을 이루는 획의 숫자로 이뤄진 '486'이라는 숫자가, 그리고 우리만 알 수 있는 숫자인 '1126611'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단방향 통신기기였기 때문에 답장을 못 받을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자 했던 현대인들의 애틋함이 바로 삐삐에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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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1010235' 이 숫자 아는 아재들만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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