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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04. 2021

취향에 대한 장인정신

커피 내음이 풍기는 도시, 강릉

격리가 해제되자마자 떠날 곳을 정했다. 바로 강릉이다. 바다를 보러 가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1세대 바리스타가 포문을 연 도시이기도 하기에 맛있는 커피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는 도중, '커피도시'로서의 강릉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박이추 선생님과 김용덕 테라로사 대표님을 주축으로 시작됐던 강릉의 커피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을까?






1980-90년대, 안목 해변의 커피자판기☕

[출처] Unsplash

커피도시로 발돋움하기 이전, 강릉의 안목 해변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1980~1990년대 안목 해변은 강릉항과 인접해있기 때문에 유동 인구가 꽤 많았던 곳이었다. 수산물 판매장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이 안목 해변을 거닐면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기 시작한 게 시초가 되었다. 덕분에 커피 자판기들이 해안가를 따라 많이 생겨났고, 강릉시 연인들의 유명한 데이트 코스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어느 분의 인터뷰를 갔는데, '안목 가자!'라고 승낙하면 그냥 그 둘은 사귀는 사이라고!) 자판기는 다양한 시럽들을 첨가하며 다채로운 커피들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바닷가를 바라보며 종이컵에 담긴 따듯하고도 달짝지근한 커피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추가로 덧붙이자면 국내에 자판기가 처음 도입됐던 건 1977년으로 롯데 산업에서 일본 샤프라는 기업으로부터였다. 기록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자동판매기(자판기)는 기원전 215년 수학자 헤론이 만든 성수 자판기였고, 현대식 자판기는 1880년대 영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엽서 자판기와 담배 자판기였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강릉 커피 3 대장☕

1) 한국 최초 커피공장으로 시작한 <테라로사>

[출처] 한국일보

강릉 하면 많은 이들이 손에 첫 번째로 꼽는 바로 그곳, 테라로사다. 실제로 국제 커피 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COE 대회의 국제 심판관으로 초청된 최초의 한국인이 테라로사 출신의 이윤선 실장이었을 정도로, 대한민국 커피계에 한 획을 그은 카페라고 볼 수 있다. 테라로사의 출발은 공장으로 시작됐다는 특징이 있다. 모두가 카페를 차릴 때 테라로사는 강원도 산지의 독특한 기후 환경에 따라 특이한 향미를 품고 있는 고급 커피를 볶는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공장이었다.


테라로사 커피공장을 처음 시작하신 김용덕 대표의 이력도 심상치 않다. 1998 외환위기 당시 다니시던 은행에서 명예퇴직하고, 미술 공부를 하다가, 속초에 돈까스 레스토랑까지 개점하셨다. 하지만 음식의 맛과 공간 디자인에 부족함을 느끼고 해외를 돌아다니다 커피에 정착하게 되셨다고. 그가 커피의 매력에 빠졌을  국내 커피 시장의 95% 동서 커피믹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발달된 고급 커피 산업(스페셜티 커피) 한국에도 들여오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그는 숯불에 생두를 볶는 고베의 '하기하라' 커피점의 문화에서  충격을 받으셨다고!)


그렇게 그는 2002, 강릉에 공장을 차리고 일본에서 원료를 받아 로스팅했다. 처음엔 커피를 직접 파는 구조는 아니었고, 카페  레스토랑 등에 후식으로 공급하는 비즈니스로 시작했다. 당시  나가던 서울 청담동 레스토랑 '안나비니' 원두를 납품하며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탔고, 이후 신라호텔, 앰베서더 등에도 줄줄이 납품하게 되었다. 이렇게 테라로사의 커피를 찾는 이들이 늘면서 서서히 브랜드로 자리 잡을  있었다.


초반엔 일본에서 원료를 받아쓰다가 2008년 COE에 참가해 미국의 스페셜티 커피를 맛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직접 생두 산지를 찾아가 원두를 구매했고, 커피 맛을 품평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산지 농부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구축해나가며 오늘날 테라로사의 모습으로 발전해나갔다.


테라로사에서 유명한 원두는 '온두라스 마리&모이'다. 커피농장 부부의 이름을 따서 김용덕 대표가 직접 네이밍 한 것이라고. 온두라스 커피 경진대회에서 1등을 한 커피이기에 맛도 참 좋다고 한다.



국산 와인 ‘마주앙’만 마시다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비싼 ‘로마네 콩티’를 접하면
그동안 몰랐던 신세계가 열리지 않습니까?
커피도 그렇습니다.
일반인은 ‘커피가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하지만
세계 제일의 커피는 맛이 다릅니다.

- 테라로사 김용덕 대표




2) 국내 1세대 바리스타의 위엄, 박이추 선생의 <커피 보헤미안>

[출처] 헬로네이처

보헤미안은 세속적인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 혹은 무언가에 억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동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내 1세대 바리스타이기도 한 박이추 선생 역시 여러 곳을 누비다 강릉에 정착했다.


재일교포이기도 한 박이추 선생은 무게감 있는 드립 커피를 국내에 알린 커피 문화의 1세대 대표 인물 중 하나다. 1986년 도쿄의 중앙 커피 주식회사와 이듬해 킷사텐이라는 커피전문학교에서 커피를 배운 후, 1988년 우리나로 건너와 혜화동에 인터내셔널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을 열었다. 이것이 지금 강릉에 위치한 '커피 보헤미안'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혜화동, 그리고 안암동에 커피점을 열었던 시기는 국내에선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그렇게 장소를 옮기다 인적이 드물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커피숍을 열고 싶다는 생각으로 2001년 경포 해변에 보헤미안 카페를 열었다. 강릉원주대에 바리스타 과정도 개설하며 그의 휘하 아래 수많은 바리스타가 국내에서 길러지기 시작했다.


그에겐 신념같이 따라오는 문장이 있다. '커피의 맛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좌우합니다'가 바로 그 문장이다. 그는 이 일념 아래, 손목 통증으로 영업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로스팅과 드립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한다고. 불 위에서 원통을 돌리는 속도와 시간, 커피를 볶은 상태, 콩을 분쇄하는 방법, 물의 종류와 온도 등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모든 작업을 직접 하신다고 전했다. (그가 내려주시는 커피를 직접 맛보기는 힘들겠지만, 카페는 꼭 가볼 예정이다)


커피 보헤미안은 파나마 게이샤, 그리고 직접 블렌딩한 커피가 가장 유명하다.



3)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농장 <(주)커피커퍼>

[출처] 식품저널

커피커퍼 커피 박물관 김준영 대표는 2002년 안목 해변에서 커피전문점으로 시작해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농장과 함께 커피 박물관을 개관했다. 2000년 제주 여미지 식물원으로부터 아라비카 커피나무 50그루를 들여와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커피 자체,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 커피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다. 총 5관으로 나눠져 있고, 1관은 커피의 역사와 문화 전시관, 2관은 로스터와 그라인더 전시관, 3관은 커피 메이커 전시관, 4관은 커피나무 농장, 5관은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커피나무 재배부터 한 잔의 커피가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접할 수 있는 곳으로 강릉 여행 코스로 인기 많은 곳 중 하나다.  






한국 커피 시장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카페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지만 커피의 가치가 '돈의 규모'로만 평가받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 커피 시장은 다르다. 커피의 가치가 '의미'로, 곧 한 사회의 '취향이 담긴 라이프스타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기술의 발전을 경제적 부, 비즈니스 혁신이 아닌 취향의 고도화를 위해 기꺼이 투자했다. 집집마다 보유하고 있는, 그리고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이탈리아인들의 정신 덕분에 파스타의 개수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하는 일화를 들어도, 이들이 얼마나 '취향'에 진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와인, 에스프레소를 보아와도 이들은 삶을 한 뼘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취향을 발전시키는데 진심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도 취향을 장인화하는 다양한 부류의 캐릭터가 생겨나고 있다. '커피의 고도화'가 우리네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냐마는, 큰 틀에서 봤을 때 우리는 '개개인의 행복'에 한 뼘 더 다가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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