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할 수 있겠지 우리?
굿모닝, 타다파니! 타다파니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부터 지끈거리던 머리는 대원들과 타이레놀 덕분에 다행히도 사그라들어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룸메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잠자리를 정리하고 방 커튼을 젖히니 마침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다. 특히나 일출과 일몰을 애정 하는 나로선 슬리퍼 차림으로 롯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푼힐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역시나 매력적이었던 타다파니에서의 아침이었다.
2,800m 고도인 타다파니에서부턴 조식으로 구룽빵과 마늘 수프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늘이 고산병 예방에 좋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울레리에서 룸메가 시켰던 마늘 수프는 별 맛이 없었는데, 여기 롯지의 것은 꽤나 맛있었다. 특히, 저 빵이 요물이다. 달작찌근하니 함께 제공되는 꿀과 잼을 곁들이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어젯밤은 오래간만에 입맛이 없길래 내심 걱정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돌아올 줄이야. 설거지한 것 마냥 싹싹 긁어먹는 내 모습을 보니 참 괜한 걱정을 한 듯 싶었다.
챙겨주신 조식을 맛있게 먹고 8시 30분 정도에 트레킹을 하기 위해 롯지를 떠났다. 오늘의 코스는 타다파니(2,630m) > 촘롱(2,170m) > 시누와(2,360m)로 총 5시간의 코스였다. 나는 다시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팀원 중 한 명이 걷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아팠기에 롯지를 떠나는데 맘이 편치 않았다.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우리는 속도를 낮추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트레킹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차푸차레의 전경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푸차레는 네팔어로 ‘생선 꼬리’라는 의미를 지녔다. 위 사진을 보면 산 봉우리가 생선 꼬리와 꼭 닮아있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각도에선 생선 꼬리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각도에선 피라미드의 삼각형 모양인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봉우리다. 처음에 본 마차푸차레는 경이로웠고, 1주일이 지난 마차푸차레는 친구 마냥 어딘가 정겨운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기사, 1주일 내내 벗 삼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료와 같은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롯지가 모여있는 마을 초입에서 인포메이션 지도를 발견했다. 항상 어디로 안내하는 표지판만 있을 뿐 전체적인 루트를 보여주는 지도는 처음이라 퍽 반가웠다. 덕분에 우리가 갔던 코스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나야풀에서 출발해 푼힐을 찍고 어느덧 시누와로 향하고 있다니. 하루하루 7, 8시간을 꼬박 걷지만 우리가 얼마나 걷고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지도를 보며 우리가 직접 지나온 여정을 마주하니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이었다.)
중간에 경유지인 촘롱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지나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유난히 히말라야의 날씨가 변덕스러운 날이었다. 쨍쨍했던 순간도 어느 순간 먹구름이 몰려와 잿빛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비가 내리다가도 어느새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갰던 순간도 많았다.
산을 타는 사람들은 흔히 ‘산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그 산을 오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인간이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이렇듯 변화하는 날씨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 인간들은 산이 허락한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산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변덕스러운 날씨 속,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문득 머리를 스쳤던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렁다리에 도착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또 높았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가는 초입에 있던 출렁다리의 규모와는 차원이 달랐다. 워낙 스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신나게 다리를 걷다 아래쪽을 내려다봤는데,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심했다. 이 다리는 보는 것 이상으로 높은 다리였다. 아무런 벽이 없이 맨몸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섰던 경험은 미국 사파리 공원에서의 열기구 탑승이었는데, 그때의 오싹했던 기억이 회상될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신나게 출렁다리도 걷고, 어느덧 점심 식사를 할 롯지에 도착했다. 이 마을의 이름은 구르중이었다. 특별히 이곳이 기억에 남는 이유도 대원들 피셜 트레킹 9일 동안 음식이 가장 맛있었던 롯지였기 때문이다.
우리 테이블에서 시켰던 4가지 메뉴는 정말, 레스토랑에서 먹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맛있었다. 농담이 아니고, 진심이다. 나는 치킨 커리를 시켰는데 로제 파스타 소스 맛도 나는 것이, 토마토 짬뽕 맛도 나는 것이, 기가 막힌 맛이었다.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까지 이 커리를 먹으러 가자는 대원들이 있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유정은 이 커리를 먹고 난 후 이후 방문했던 롯지마다 치킨 커리를 열심히 찾아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메뉴를 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우다 보니, 서서히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리 옆 벽면에 ‘Cooking Class’를 진행했던 사진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 사진을 보고 왜 음식이 맛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음식을 잘하는 곳에서 쿠킹 클래스가 열릴 수 있다는 건 만국에서 통하는 엄연한 진리인 듯싶다.
점심 식사를 하고부터는 팀원의 이동이 너무 힘들 것 같아 선발대와 후발대가 나뉘어 트레킹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부장이었던 동욱과 포터 라빈이 승협과 함께 구르중에서 조금 더 휴식을 취한 뒤, 촘롱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며칠 간의 이별이 시작되었다. 아픈 승협과 그를 걱정하는 동욱의 표정을 보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나아서 시누와 까지 꼭 다시 올 수 있길 바라는 기도를 남기고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시누와로 출발했다.
점심을 먹기 전에도 날씨는 꽤나 우중충했기에 우리는 우비를 입고 이동하고 있었다. 날씨가 개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과는 달리 점심을 먹고 난 뒤로는 풍경이 아예 안 보일 정도로 날씨가 더 흐려졌다. 우비로 인해 땀이 차고, 휴식 시간에는 땀이 식는 게 반복됐던 하루였다. 그래도 오늘의 롯지는 시누와, 얼마 높지 않은 고도이기 때문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촘롱과 시누와는 몇 안 되는 사유지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행복한 곳이기도 했다. 옆에 붙어 있는 이 두 동네는 롯지도 굉장히 많은, ABC 트레킹 코스 중에서 가장 크고 북적이는 마을에 속한다. 그만큼 숙박하는 트레커 분들도 많고, 분위기도 아기자기하니 참 이쁜 동네였다. 사진 속에 담긴 메뉴판처럼 한식을 파는 곳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 트레커들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아닐 수 없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블로그에서 자주 봤던 체크포인트도 거쳐 갔다. 체크 포인트에선 Trekking Permit과 Insurance를 검사하는데, 모든 트레커는 해당 서류를 확인한 후에야만 이 지점을 넘어갈 수 있다. 든든한 가이드 시리가 순조롭게 잘 진행해준 덕분에 우리는 별 무리 없이 체크 포인트를 지나갈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예상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졌던 하루였다. 해가 뉘엿뉘엿 들어가면서 금방 어둠이 찾아왔고, 우리는 헤드랜턴을 쓰고 엄청난 오르막 계단을 올랐다. 이때부턴 시누와 롯지에서 먹을 백숙만을 생각하고 악으로 계단을 올랐던 것 같다. 시누와는 고레파니와 마찬가지로 위쪽(Upper)과 아래쪽(Lower)으로 나뉘었고, 우리는 역시나 위쪽 시누와였다. 그래도 꾸역꾸역 열심히 잘 올라 시누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짐도 풀고 개운하게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렸던 백숙도 먹었다. 시누와의 명성답게 무려 깍두기와 배추김치도 있었다. 더군다나 시누와 롯지가 특별한 이유는 이곳에서는 네팔의 쌀이 아닌 한국의 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인데, 덕분에 한국에서 먹는 것 같은 백숙 본연의 맛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산 위에선 컵라면도 맛있는데, 백숙은 얼마나 맛있었을지 상상이나 됐겠냐고요!
대원 다 같이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로비에서 일기를 쓰다 9시 정도에 각자 방으로 잠자리를 준비했다. 나는 잠시 마당으로 나와 쏟아지는 별을 보며, 승협이 하루빨리 기운을 회복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짧은 기도를 마치고 이른 잠을 청하러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