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날씨가 다한 날

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밥을 남겼다

by YEON


굿모닝, 시누와! 시누와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단 하루만이 남은 아침이었다. 늦지 않게 트레킹을 시작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눈을 떴고, 덕분에 방문을 열었던 순간 맞이했던 시누와의 일출을 맞이할 수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은은하게 펄럭이는 기들이 어우러진 장면이 참 아름다웠다.



안나푸르나 트레커들에게 ‘시누와’하면 저절로 한식이 떠오를 것이다. 그 명성답게, 무려 김치찌개가 조식으로 제공됐다. 한국에서 먹는 것만큼 맛있었던 찌개였다. 시누와는 하산 루트에도 포함됐던 곳이기 때문에 대원들과 메뉴판을 보며 그땐 뭘 먹을지 벌써부터 설레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김치볶음밥으로 정했다. 그때는 술도 마실 수 있으니 맥주든 네팔 소주는 한 잔 곁들이며 할 생각에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졌다.



오늘의 코스는 시누와(2,360m) > 밤부(2,310m) > 도반(2,600m) > 히말라야 롯지(2,920m) > 힌쿠동굴(3,170m) > 데우랄리(3,200m)로 총 6시간 30분의 코스였다. 시리한테 코스 설명과 소요 시간을 대략 듣고 나면 얼추 느낌이 온다. 6시간 30분이 기준인 경우 점심 먹는 시간까지 합치면 약 2시간 정도가 더 소요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속도를 내서 가기로 시리와 다짐을 나누고, 부지런히 목적지인 데우랄리로 향했다.



어제 트레킹 내내 비바람이 분 것과 달리 오늘의 날씨는 매우 바람직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 적당히 건조한 습도까지. 걸으면서 보이는 마차푸차레가 마치 우리를 ABC까지 허락해준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길게 예정된 트레킹이었기 때문에 목적지에 언제 도착할지 기다리는 마음은 접어두고 풍경을 벗 삼아 즐겁게 산행에 임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Way to ABC’라는 표지가 눈에 자주 띄었다. 벌써 내일이면 우리가 9월부터 기다리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한다. 마지막까지 고산병에 대한 긴장을 풀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떨리고 신이 나던 기분을 숨기긴 어려웠다. 이 표지판은 나의 자극제가 되어 더 속도를 내어 걸어가야겠다는 도전의식을 불러오기도 했고, 오르기 힘들 때면 나를 일으켜주는 멋진 친구이기도 했다.


날씨가 참 좋은 날이었다. 사실 우리가 카트만두에 있을 때만 해도 네히트(네이버 대표 히말라야 트레킹 카페) 등의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ABC까지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상당했다. 심지어 ABC로 갈 예정이었던 많은 분들이 다른 트레킹 코스를 검색하고, 우리도 그중 일부이기도 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건 내가 봐도 잘 찍은 것 같다.


가이드 시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이 정도 날씨로는 그래도 ABC까지는 무리 없이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는데, 웬걸 우리가 천운을 타고났나 싶을 정도로 날씨는 무척이나 맑고 푸르렀다. (하지만 이런 날씨도 안전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데우랄리를 지나는 코스에선 눈이 녹아 산사태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실제로 이 지역을 지나며 실제로 산사태를 목격하기도 했다.)



밤부와 도반을 지난 길목에서 점심시간을 가졌다. 하루에도 롯지식을 3번이나 먹으니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 롯지를 가도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메뉴들을 정해봤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스프링롤이었다. 맨날 대원들이 남긴 것만 뺏어 먹었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튜나 치즈 스프링롤을 점심메뉴로 정해보았다. 튜나는 약간 비린 맛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짭짤하니 맛있었다. 패기롭게 나와 같은 메뉴를 시킨 룸메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했고, 그의 메뉴는 자연스럽게 내 접시 위로 안착했다. 식사를 마친 후 주전부리로 살게 없나 둘러보다가, 처음 보는 초콜릿 바가 있어 구매해보았다. Mars라는 초콜릿바였는데 정말 맛있었다. 시누와에서 샀던 오레오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말이다.



속도를 냈던 덕분일까, 우리는 2시간 정도를 단축시켜 데우랄리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데우랄리에 도착하니 혼자 오신 한국 트레커 분도 계셨고, 다른 외국분들과 포터, 가이드 분들이 참 많으셨다. 도착해서 짐을 풀고 로비에서 몸을 녹이고 있으니 한국분들이 정말 많이 오시기 시작했다. 이곳도 역시나 만남의 광장 분위기였다. 한국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들 수 있었던 그 분위기 자체가 나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저녁으로 라면을 먹다가 후발대인 동욱과 승협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결국 산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포카라로 향하고 있다고 동욱이 말해주었다. 상태가 계속 호전되지 않아서 병원도 들릴 예정이라고 그에게 건네 받았다. 같이 떠났던 7명 다 같이 ABC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저녁 내내 울적했던 하루였다. 결국 라면을 먹다가 선발 대원들은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고, 그렇게 아무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한 동안 훌쩍거리는 소리가 우리를 감쌌다. 아팠지만 끝까지 노력해준 승협과, 그를 챙기기 위해 오르고 싶은 마음도 포기하고 임무를 다하기 위해 하산했던 동욱이 무척이나 보고 싶던 하루였다.


그들 몫까지 올라 이쁜 사진이라도 많이 담아서 내려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렇게 우리는 눈물의 밤을 보냈다. (그땐 낮이었지만, 지금은 밤이다.) 그리고 바로 이 날이, 내가 히말라야 롯지에서 밥을 남겼던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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