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0] 내 생에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날

4개월간 그려왔던 목표를 달성했다

by YEON


굿모닝, 데우랄리! 오늘은 드디어, ABC에 오르는 날이다. 눈을 뜬 순간부터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데우랄리는 3,200m가 넘는 고도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지난밤 비니부터 넥워머, 패딩까지, 자는 동안 체온 유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힘썼다. 덕분이었을까, 다행히 두통 등의 고산병 증세는 피해 갈 수 있었다.




패킹을 하던 도중, 노리쉬가 우리 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필히, 아침이 준비되었다는 뜻이다! 고산병 예방을 위해 조식으로 마늘 수프와 구룽빵이 준비되었다. 마늘 수프도 롯지마다 그 맛이 다양한데, 데우랄리의 마늘 수프는 한국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딱 삼계탕 국물을 먹는 느낌이었다. 반면 여느 롯지나 비슷한 맛을 띠고 있는 구룽빵은 네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롯지는 추웠지만 이 마늘 수프 한 입이면 온 몸이 따듯해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우리는 ABC로 출발했다.


오늘의 코스는 데우랄리(3,200m) > MBC(3,700m) > ABC(4,130m)로, 총 5시간 30분의 코스였다. 고대하던 ABC를 도착하는 날이기도 하면서, 난생처음으로 4,000m 이상의 땅을 밟아보는 날이다. 기다려온 목표를 이루기 바로 직전의 감정은,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짜릿하고 설레는 기분이다.



날씨가 워낙 좋았기 때문일까. ABC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따듯했다. 물론 절대적인 기온 자체가 따듯한 건 아니지만 볕이 강했던 덕분에 트레킹을 하며 땀이 비 오듯 났다. 팀원들끼리 ’이 날씨면 반팔도 입겠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예상치 못했던 복병은 주위에 새하얗게 펼쳐진 눈밭이었다. 강한 볕이 흰 눈을 타고 반사되어 피부가 익는 느낌이 들었고, 우리는 중간중간 목과 얼굴과 같이 노출된 부위를 선크림을 계속해서 덧바르며 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피부 타는 거 조심해‘라는 말은 들어만 봤지, 꽁꽁 사매고 올라가는 겨울의 히말라야에서 피부가 탈 일을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했던 건 고도가 높아질수록 짙어 보이는 하늘의 색이었다.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산소가 부족해지고 기압이 높아지면서 하늘의 색이 남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선글라스를 껴서 어둡게 보이나 보다 싶었는데, 정말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가득했다. 팬톤에서 발표한 2020년 색상이 ‘클래식 블루‘라는 색인데, 히말라야에서 보고 있는 하늘과 정말 비슷한 색감이었다. 올해의 시작을 히말라야와 함께 했는데, 심지어 올해의 컬러와도 비슷한 색을 만날 수 있다니! 괜스레 기분 좋은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열심히 오르다 MBC(Machhapuchhre Base Camp)의 표지판을 만났다. 표지판이 보인다는 건, 해당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점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지만, ABC에 도착했을 때 대원들 중 고산병 증세가 심하게 보이는 이가 있으면 MBC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랬기에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MBC를 지나 ABC를 향하던 도중 들었던 얘기인데, 트레커들 중에선 ABC를 찍고 MBC에서 숙박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ABC는 일단 너무 춥고, 와이파이가 안 되고, 전기가 아예 안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ABC는 모든 밤을 통틀어 우리가 느꼈던 가장 추웠던 날이기도 했다.



’이 풍광을 배경 삼아 걷고 있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던 경이로운 뷰와 함께 걷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관문인 MBC에 도착했다. MBC 롯지로 오르는 길엔 Rescue Center라는 작은 컨테이너 창고가 있는데, 무려 KT에서 지은 센터라고 한다.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태극기를 보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점심식사로는 모모(만두)를 주문했다. 먹고 힘 좀 내볼까 싶어서 모모 중에서도 가장 비싼 메뉴를 주문했다. 같이 나온 소스와 찍어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그릇을 비우고 테이블을 쳐다보니 역시나 밥맛이 없는 팀원들이 남긴 메뉴가 있었다. 이전에 한 번도 시켜본 적 없었던 메뉴 중 하나인 치즈 베지 포테이토‘라는 메뉴였다. 짭조름하니 너무 맛있어서 ABC에선 이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점심시간을 마무리했다.



MBC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꽤 길게 휴식을 취했다. 고산병 증세를 조금씩 보이는 대원들이 있어 증세가 더욱 심해지는 걸 막기 위해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가이드 시리는 분명 우리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눈에 파묻혀 천사 날갯짓도 해보고, 눈사람도 만들고,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인생사진도 여럿 남기며 시간을 보냈다.


열심히 사진을 찍다 지쳐 점심을 먹었던 자리에 앉아 문득 마차푸차레를 올려다봤다. 내가 앉은 곳에선 마차푸차레가 생선 꼬리가 아닌 이집트 프라미드의 모양을 닮아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은 다르지만, 이젠 어딜 가나 보이는 마차푸차레가 꼭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마지막 관문인 ABC로 출발했다. MBC에선 40분 정도 걸리는 길지 않은 코스라고 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ABC의 안내판이 어렴풋이 보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ABC,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안내판을 지나 롯지까지 가면서 머릿속엔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포카라에 있는 승협과 동욱은 뭐 하고 있을까?’라는 걱정이 가장 먼저 스쳤고, 그 뒤로 지난 4개월 동안 크로커스 원정대에 대한 고민들과 힘들었던 순간들,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동료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피어올랐고, 마지막으로는 무엇보다 내가 해냈다는 순간에 대해 진심으로 감격스러웠다.


ABC에 올라가니 귀여운 개 3마리가 있었다. 트레커들과 꽤나 놀아본 솜씨인 건지, 부르자마자 나한테 와서 엄청난 애교를 피우는 거다. 너무 귀여운 나머지 고산병에 대한 걱정도 잊고 뛰어 올라가 강아지와 이리저리 ABC 곳곳을 돌아다녔다. 전기도 안 통하는 이런 오지 속에서 동물과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이곳만의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ABC에서는 우리 5명 다 같이 한 방을 썼다. 10인실을 배정받아서 침대도 각각 2개씩 쓸 수 있어 짐을 풀기에는 굉장히 편했다. 가장 고도가 높다 보니 역시나 방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사뭇 달랐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낭을 피고, 이불 두 겹을 덮어 두며 밤에 조금이라도 더 따듯하게 자기 위해 준비했다.



롯지마다 있는 다 같이 식사할 수 있는 로비에서 시리와 노리시, 꾸마라이와 대원들과 함께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데, 시리가 일몰 시간을 말해주며 나가서 꼭 일몰을 보라고 당부해줬다. ABC의 일몰은 6시 40분 정도였고, 시간 맞춰 다 같이 나가니 눈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몰의 빛을 받은 마차푸차레와 그 옆 안나푸르나 산맥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위에만 색칠한 것 마냥 완연하게 빛으로 분리된 산맥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와‘하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산맥이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이 일몰을 보며 처음 받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낙조를 뒤로 하고, 다 같이 둘러앉아 저녁이 나오기 전까지 로비에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 트레킹 하는 내내 떠들고, 점심 먹는 내내 떠들고, 저녁 먹는 내내 떠들고 하물며 잠들기 직전까지 떠드는 우린데 오디오는 왜 빈틈이 없는 걸까? 관심사와 취향이 비슷하고, 하물며 완전히 비슷하진 않더라도 웃음코드가 맞는 우리들의 대화는 항상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더군다나 트레킹을 하는 도중엔 우리들의 목표는 오로지 ‘ABC’ 밖에 없었다. 현실의 고민에 잠시 거리를 두고,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시간을 쏟았던 시간들은 우리를 걱정보다는 즐거운 감정으로 에워쌀 수 있었던 게 한몫했던 것 같다.



저녁 메뉴를 주문할 시간이 다가왔고, 아까 MBC에서 한 입에 반한 포테이토 메뉴를 주문했다. 고산병에 좋은 레몬 진저 티와 함께 저녁도 마무리하고, 우리들만의 소소한 ABC 기념 파티를 시작했다. 트레킹을 준비하며 열심히 유튜브를 찾아봤던 다혜 언니는 ’ABC에 올라가면 이 디저트를 먹어야 한다’며 초코바를 몇 개 주문했다. 특이한 방식으로 불에 구워서 먹는데 대원들 표정이 다 안 좋은 거다. 다 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초코바는 그냥 주문해서 통째로 먹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우리들의 짧은 파티는 막을 내렸다.



아마도 밤부쯤에서부터 였을 거다. 코스가 겹쳐 트레킹 중간중간 자주 뵀던 한국 트레커 두 분이 계셨다. 알고 보니 그들과 ABC에서도 같은 숙소에 묵게 됐다. 저녁 시간이 끝나고 디저트 파티를 하던 도중, 트레커분들께서 핫팩 한 통을 건네주셨다. ABC는 생각보다 추우니 다 같이 나눠서 몸에 붙이고 자면 괜찮을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날씨는 추웠지만, 마음은 따듯했던 ABC에서의 추억들이었다.



그리고 얘가 바로 ABC 지킴이 멍멍이다. 온순하고 애교도 많아 ABC에서 있는 내내 같이 놀았다. 고산병을 조심하려면 절대 뛰지 말아야 하는데, 오자마자 이 친구 때문에 신이 나버려서 ABC를 뛰어다니고 말았다. (아, 그리고 사진을 보고 생각난 건데 대부분의 포터와 가이드 분들께선 사진 뒤에 위치한 평상 위에서 다 주무시는 것 같았다.)


다 같이 모여 일기를 쓰고, 핫팩을 나눈 후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4,000m가 넘으니 몇몇 대원들에게 두통 증세가 찾아왔다. 이미 크게 고산병이 왔던 친구가 있었기에,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며 ABC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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