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k Area는 조심 또 조심합시다.
굿모닝, 안나푸르나! ABC에서의 날이 밝았다. 전날 단단히 껴입고 잔 터라, 두통 증세나 숨이 막힌다거나 하는 현상은 없었다. 하지만 룸메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진 것 같아서 걱정이 많이 됐다. 다혜 언니와 성혁도 밤 내내 머리가 아파서 고생이었다고 이야기해줬다. 4,100m 이상의 고도라 내려가려면 한창인 터라 상태가 더 나빠지면 안 되는데, 옆에서 작은 짐을 들어주거나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 밖에 도와줄 수가 없어서 아픔이 심란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일출을 보겠다고, 우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몰은 마차푸차레 산맥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일출은 그 반대편인 안나푸르나 산맥이 주황빛으로 물든다. 그것도 딱, 일부분만 말이다. 마차푸차레 뒤로 물들어가는 연보랏빛과 노란빛이 한데 어우러지는 풍광도 물론 이뻤지만, 메인은 바로 이 안나푸르나였다. 중간에 구름이 끼어 산맥이 서서히 물드는 장면을 보진 못했지만, 광경 그대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살면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어젯밤부터 기분이 무척이나 황홀했다.
일출도 보고, 짐도 패킹하고, 여전히 그래 왔던 것처럼 아침을 챙겨 먹고 트레킹을 나섰다. 일상과도 같았던 롯지에서의 아침도 이제는 단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다니. 뒤숭숭한 기분을 안고 출발했던 하산길이었다.
오늘의 코스는 ABC(4,130m) > MBC(3,700m) > 데우랄리(3,200m) > 히말라야 롯지(2,920m) > 도반(2,600m) > 밤부(2,310m) > 시누와(2,360m)였다. 오늘도 역시 길고 긴 트레킹이 예상되어 있었다. ABC 트레킹을 하는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도반에서 주로 숙박한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시누와를 목적지로 정했다.
롯지에서 조금 내려와 ABC 표지판 앞에서 다 같이 단체사진도 찍고, ‘CROCUS EXPEDITION’이라고 큼지막히 썼던 종이도 함께 걸어놓고 왔다. 표지판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증명사진들이 붙어있었고, 그들 중에선 한국 사람들도 꽤나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도 역시 이들처럼 ABC라는 아름다운 도전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반가웠다, ABC! 짧은 하루였지만 ABC를 위해 달려온 시간들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
어제부터 같이 놀았던 롯지 지킴이 멍멍이의 수호를 받으며 하산길에 올랐다. 생각보다 많이 내려와서 길을 못 찾아가면 어쩌나, 싶었는데 내려오다가 인사를 하더니 다시 ABC로 올라가는 거다. 같이 못 갈걸 알면서도 헤어진다니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오르막길보다는 하산길이 역시나 빨랐고, 더 수월했다. 다만 힌쿠동굴까지 가는 길목에 Risk Area가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는 상당한 긴장을 했다. 실제로 사고가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고, 우리가 내려왔던 날은 날씨가 너무 따듯한 탓에 위에서 눈들이 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시리는 최대한 빠르게 내려가자고 당부했고, 우리는 거의 뛰다시피 이 지역을 넘어왔다.
이번 트레킹을 하면서 모두에게 고마웠지만, 내게 있어 가장 고마운 존재들은 크로커스의 눈, 카메라를 담당했던 대원들이었다. 사실 트레킹을 하면서 자기만족으로 찍는 사진들은 쉽게 찍을 수 있지만, 중간중간 타인의 모습을 저장하기란 쉽진 않은 일이다. 체력적인 한계도 있고, 매사에 ‘찍어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나 말고 다른 이들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에는 굉장한 노력이 뒷받침된다고 생각한다. 성혁과 다헤언니 덕분에 나도 몰랐던 우리들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이 글을 빌려 전하고 싶다.)
우리는 히말라야 롯지에서 점심식사를 가졌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시켜보지 않았던 메뉴인 토마토 치즈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당을 채워줄 초코바도 사고, 음료수도 마시며 옆에 있는 롯지 강아지와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쯤 되니 같은 롯지에서 식사하는 트레커분들은 그냥 다 친구가 된다. SNS 팔로우는 물론, 시답잖은 수다도 떨어가며 ‘We are the world’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 혼자 왔던 러시아 트레커 분도 같은 메뉴를 시켰길래 먼저 말을 걸었다. 그와 최종 목적지는 달랐지만, 코스가 겹쳐 가는 동안 같이 오르막도 오르며 서로를 응원해줬던 기억이 떠오른다. 잘 살고 있겠지?
오늘 트레킹 코스가 제법 긴 탓에 시리가 흥미로운 게임을 제안했다. 내가 뒤따라 갈 테니, 먼저 시누와 까지 직접 찾아가 보라는 제안이었다. 그 와중에 승부욕이 치솟은 팀원들은 미친 듯이 시리를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무려, 시누와 까지 말이다. 나는 중간에 복통과 다리를 삐끗해서 아쉽지만 게임은 포기하고 시리와 떠들며 함께 하산했다. 시리가 사진 찍는 스팟도 많이 알려주시고, 쉽게 볼 수 없는 뷰 포인트도 알려주셔서 다양한 사진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초 볼 수 없는 희귀한 마차푸차레 뷰까지! 저때가 일몰 즈음이었는데, 지는 노을빛에 반사되어 마차푸차레만 저렇게 물든다. 딱, 저 부분만 말이다. 몇 초 지속되지 않는 풍광이기 때문에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려가기만 하면 볼 수 없는 뷰라고 하셨는데, 덕분에 직접 눈으로 담을 수 있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시리와 노리시와 이러저러 이야기를 하며 내려오니, 어느덧 시누와에 도착했다. 시간에 맞게 도착해 다행히 물드는 노을을 담을 수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일몰만이 풍기는 빛내음이 좋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어떻게 이렇게도 각각의 매력이 있는 건지. 그래서 나는 일출보다는 일몰을 좀 더 선호한다. 바깥 의자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강아지가 한 마리 앉았다. 같이 쪼그려 앉아 노을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풍경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이 찡해지곤 한다. 특히 완전한 하산을 하루 남둔 시누와에서는 더더욱 울컥하는 감정이 생겨났던 것 같다. 트레킹을 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내가 이렇게 좋은 시간들을 감히 누려도 되는 건지, 그리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아무런 갈등 없이 괜찮은 여행을 하고 있어도 되는 건지,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하나둘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럭시라는 네팔 소주를 한 잔 한 것도 원인이었던 것 같긴 하다.)
저녁으로는 고대하던 김치볶음밥과 럭시를 한 잔 시켰다. 술이 한 잔 들어가니 밥맛은 생각보다 없었고, 시리와 네팔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롯지 주방에 놀러 가 술도 몇 잔 얻어먹고 밖으로 나와 별을 보며 하염없이 멍 때리고 앉아 있었다.
팀원들이 나와서 말동무도 해주고, 같이 별도 보고 사진도 찍으며 우리들의 마지막 밤을 기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감히 볼 수 없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보며 우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밤을 맞이했다.
여러 감정이 북받쳤던 히말라야 롯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인생에 다시없을 소중한 도전에 함께 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하며, 동욱과 승협을 보며 우리는 포카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