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시체
나와 너와 함께 만든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추억이라고 하고 기억이라고도 한다. 나는 추억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래. 추억이 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라는 하나의 실타래 중에 그 추억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실타래를 다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몇 가지의 도구를 이용해서 책갈피를 만들어 표시한다. 사용하는 도구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장소나 시간, 냄새, 사진, 글, 그리고 사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갈피는 사람이다. 삶을 살아가다 희미해지고 연해지는 실타래의 한 부분을 다시 진하게 만들고 싶을 때, 가끔씩 생각이 날 때,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그 추억을 다시 볼 수 있고 아직 그 추억이 살아있구나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책갈피 속에서도 죽어있는 추억이 존재한다. 추억의 시체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이 추억을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과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하나의 사실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 추억은 이 두 이야기가 모두 합쳐지지 않으면 죽은 것과도 같다. 이 추억이라는 놈은 비익조와 같아서 (SG워너비 - 『비익조』가사 중에서... 하나의 눈과 반쪽 날개론 날 수도 없는 가슴앓이 새처럼 ) 나만의 이야기로는 살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당신과 나와 만남이 없고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면 결국 죽어있는 추억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게 된다. 당신과 함께 걸었던 이 거리를 걸으며 몇몇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내 발걸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체를 지켜보기에는 아직 잔인할 만큼 마음이 미어진다.
아쉽다. 이 추억을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 없다는 것이... 그래서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살아있는 추억이다. 살아있는 추억을 마주하려면 다른 이야기가 필요로 하다. 그래서 내가 그리워하는 건 당신 입에서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당신의 이야기로 추억의 시체를 되살리는 흑마술을 부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자 섬칫해진다.
나는 지나간 추억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추억의 시체를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진다. 그래서 마음이 미어질 때마다 술이 떙기는 이유도 그것인 것 같다. 추억의 묘지에 술을 부으며 나도 한잔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