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재생산>을 읽고
세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 속에서 청소년들이 보여주는 반사회적, 반학교 문화는 어느 나라든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복장 문제, 음주·흡연, 학교폭력, SNS를 통한 사이버 괴롭힘 등이 그러하다. 학생들이 학교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러한 행동을 할 때, 사회는 이들을 쉽게 ‘문제아’로 낙인찍는다. 낙인찍힌 학생들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문화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그 결속력 안에서 일종의 자존감을 회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학교 문화가 과연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안정감과 삶의 방향성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반학교 문화는 단순히 교사와 교직원의 권위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지식과 학습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다. 특히 요즘 학생들은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유튜브나 틱톡, 아르바이트 경험 등을 통해 ‘세상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빠르게 체득한다. 일부 반학교적 학생들은 학교 규범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범생이’와 자신을 구분 짓고, 현실에 더 가까이 있다고 느낀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꿈이나 목표가 아니라 당장의 생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자유다. 그래서 이들은 좋은 직업이나 안정적인 삶을 위한 공부보다는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일, ‘손에 잡히는 노동’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점점 사회 속 노동자 계층으로 조기 진입하게 되고, 이 과정은 폴 윌리스가 지적한 ‘계급의 재생산’ 현상과 맞물린다. 더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의 소득과 배경이 자녀의 교육 수준과 사회적 계층을 결정짓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한참 전에 그 의미를 잃었고, 청소년들 스스로도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구조적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
비공식적인 학교 내 집단문화와 노동현장에서의 또래문화가 유사하다는 윌리스의 분석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특히 학교 밖 노동현장에서 일찍부터 경험을 쌓는 청소년들이 이론이나 자격증보다 현장에서의 실용적인 감각과 기술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모습은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학문적 지식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방식, 당장의 즐거움과 반복되는 일상은 결국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구조 속에서 이어지는 삶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선택한 삶 자체를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이며, 누군가는 반드시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너무 이른 시기에 그 구조에 편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구조적 강제에 가까운 현실이며, 그래서 더 안타깝다.
이러한 현실에서 학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이상적으로는 계급 재생산 구조 자체를 끊어야겠지만, 당장 실현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진짜 의미 있는 직업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취업 대비 교육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형식적이거나 노동계층 청소년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2025년 현재 직업교육이라 하면 여전히 실업계고와 일부 진로 수업에 국한되어 있다. 문제는 진로 수업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거나, 자율학습 시간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반학교적 성향의 학생들에게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도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영국처럼 뚜렷한 노동자 계급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부모 세대는 자신들의 고된 노동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하며, 자녀들도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이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는 분석은 한국 현실에서는 다소 맞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사회구조는 사실상 계급이 ‘은밀하게’ 재생산되는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다. 부모의 배경이 교육기회를 결정짓고, 이는 다시 계급적 지위를 결정한다. 이런 구조를 너무나 일찍 깨달아버린 학생들이 지식을 포기하고 방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계급의 재생산은 정말로 학생들의 ‘선택’일까? 아니면 그 선택을 강요받도록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의 유일한 '경로'였던 걸까?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신적인 노동보다는 육체노동을 택하고, 그 과정에서 반학교 문화를 통해 저항의 방식을 실현한다.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왜 그들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단순히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교육과 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구조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반항하는 학생들을 무조건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왜 반항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채 교육의 본질을 지켜나갈 수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지식’이 아니라 ‘삶’에 대해 가르쳐야 할 때이며, 교육이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아닌 진정한 기회의 통로로 다시 거듭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