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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사이로 Aug 29. 2023

빌려 온 풍경들


제 작은 시골집을 '수풀집'이라 부릅니다. 폐가 상태의 집을 처음 만났을 때, 수풀이 무성했던 모습을 보고는 큰 고민 없이 바로 이름 붙였어요. 서울집은 '꼭대기집'이라 부릅니다. 건물 가장 위층에 위치한 집이거든요. 대출의 꼭대기에 내앉으며 이사를 감행한 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이 두 집의 생김새는 무척이나 다릅니다. 수풀집은 한옥 양식으로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집이라, 집을 구성하는 선과 면이 균일하지 않아요. 규격화되어 있지도 않고요. 그런데도 그 자유로운 선과 면이 균형 있게 다시 모입니다. 아름답고 아늑하게요. 반면 꼭대기집은 모든 면이 간결한 네모입니다. 모든 선과 면이 예측가능한 지점에서 만나고 흩어집니다. 그렇기에 생활동선이 편리하고, 공간이 시원시원하지요.


꼭대기집과 수풀집은 이렇게나 다른 공간이지만, 의외로 닮은 구석이 있어요. 거실에 큰 창이 있고, 소망이와 저는 그 창 곁에서 많은 시간을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점입니다. 어느 날은 볕이 너무 좋아서, 또 어느 날은 비가 많이 내려서, 여린 초록이 유난히 빛나서, 노을이 아름다워서, 서늘한 바람이 좋아서, 눈 내린 풍경이 예뻐서, 옥상에서 빨래를 너는 이웃의 모습이 정겨워서- 창가에 앉습니다. 이곳에서 사계절을 보내고 또 맞이합니다. 매일 아침을 열고, 매일의 해를 보냅니다. 그 어떤 멋진 인테리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장면과 감각들이, 창을 통해 수풀집과 꼭대기집에 깃듭니다.


수풀집과 꼭대기집

사실 이 글은 우연히 차경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차경(借景). 빌릴 '차'에 경치 '경'자로 이루어진 이 단어는, 직역하면 경치를 빌려온다는 의미입니다. 자연경관을 건축 속으로 끌어들여, 외부 경관이 마치 건축의 일부인 것처럼 활용하는 동아시아 전통 건축기법을 일컫는 단어인데요. 듣고 보니 수풀집과 꼭대기집 모두, 차경을 통해 완성되는 집이구나 싶었어요.


집 안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도, 외롭거나 지루하지 않은 것도 덕분입니다. 창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이 생동하는 사시사철을 열심히 차경하고 있으니까요. 집에서 일하고 또 집에서 쉬는 저는, 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집의 일부가 아니라 집의 전부인 것처럼 굴며 많은 시간들을 보냅니다. 매일 감탄하고, 매일 여러 방식으로 기록하며, 애정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 풍경은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며, 소유할 수도 없다는 점을 생각합니다. 차경이란 단어의 의미처럼, 잠시 빌려 온 것이니까요. 온전히 내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가 없이 누리는 것에 감사하며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광들을 계속 빌려 쓰고 싶고, 다음 세대도 그럴 수 있었으면 하니까요.


지금도 창가에 앉아 주간보고를 적고 있습니다. 요즘은 해가 지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설명하기 어려운 빛깔로 물듭니다. 요 며칠은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크게 들려오고요. 귀뚜라미가 크게 울면 24도라는 말이 떠올라, 기온을 확인해 보니 기가 막히게 24도입니다. 이보다 기온이 떨어지면 변온동물인 귀뚜라미의 근육이 수축하게 되고 신체활동도 느려져, 울음소리가 작아지고 소리의 간격도 더 길어진대요(알아보고는 신기해서 늘어놓는 귀뚜라미 tmi).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시작되는 지금, 제가 빌려 보고 들은 순간을 담아 전합니다. 저녁놀이 붉게 물들고 귀뚜라미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우는 때의 풍경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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