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자주 와 계시던 외할머니께서 어느날 말씀하셨다. '머리도 좀 해야하고, 돋보기도 새로 좀 하고, 병원을 가야겠어.' 내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으셨다. 지금의 MBTI로 보자면 무조건 극 I인 할머니께서는 몇 주에 한 번 마음 먹고 밖을 나갈 채비를 해서 나가는 날이 있었다. '파마'나 약을 타러 가는 날. 왜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철에 맞춰 담글 김치 재료도 좀 사고 장도 보고. 그럼 나는 항상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할머니와 함께 박하사탕을 입에 하나 물고 손을 꼭 잡고.
어릴 땐 몇 가지 순서가 있었다. 할머니와 이것저것 장을 보고 할머니가 잔돈을 쥐어주면 오락기에서 게임을 몇 판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게임을 왜 했나 모르겠다. 잘 하지도 못했고 지금도 게임을 잘 하지 않는다. 그냥 으레적으로 이 나이면 이걸 해야하나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락기 앞에 아이들이 많으면 그저 그냥 쭈뼛쭈뼛 돌아오기도 하고 그랬던 나였다. '할머니 오늘은 안 할래.' 그런 날이 있는가 하면, 할머니가 머리를 하는 날은 스케줄이 달랐다. 할머니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말고, 같이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미용실에 가서 할머니 머리를 중화하고 또 같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미용실을 할머니따라 들어가면, 미용실 주인이고 손님이고, 항상 나는 인기스타였다. 할머니가 만든 스타. '얘가 그렇게 착해요. 손녀처럼. 지 할머니가 어딜 가도 쫓아 다니고, 내가 병원을 가든 미용실을 가든, 장 보러 나올 때는 절대 무거운 거 지 할머니 손에 안 들게 하고 자기가 저 작은 손으로 다 들고.' 그럼 여기 저기서 '아이고 예뻐라' 소리가 터져나오는 재미진 광경이 있었다. 손녀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눈치 없는 말 따위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못했다.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던 손자다. 자부하고 자신있다. 영원한 외출 파트너인 나는 자퇴를 했을 정도로 클만큼 컸어도 할머니와 또 동행했다. 붕어빵도 좀 사먹고, 호떡도 좀 사먹고. 머리, 돋보기.. 이번 병원을 가자고 하셨던 건 무릎 때문이 아니었다. 감기 때문이었다. 숨쉬기도 좀 불편하시다고 하셨다. 병원에서 나와 약도 타고 며칠에 걸쳐 하나 하나 같이 해나갔다.
그렇게 수 개월이 흐르고 엄마와 나는 또 이사를 가야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살게 된 것. 행복하고 좋았다. 언제나 딸네 집에 와서 손자에게 볼을 부벼주고 같이 자고 했던 분들과 같이 산다고? 아빠는 점점 삶 속에서 멀어져만 같았는데 그 빈자리를 채워줄 감사한 분들, 그리고 아빠 대타의 역할로는 최고의 분들 같았다. 들뜬 마음으로 또 한 번 주거 환경이 바뀔 것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