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향 Jul 08. 2022

부침개가 이토록 낭만적인 음식이었다니

많은 사람들은 인생드라마 혹은 인생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한, 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꼭 ‘인생’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아도 몇 번이고 보게 되는 작품들 말이다. 나에겐 OST만 들어도 여전히 설레는 노팅힐, 저런 사랑을 해보겠노라 다짐했던 노트북 등이 그렇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보고 나면 추운 겨울 만난 손난로와 같은 작품들이다.


‘내가 찜한 콘텐츠’에 담긴 작품들 중에 ‘리틀 포레스트(한국판)’가 있다. 잔잔한 소음이 필요할 때 틀어놓기도 하고, 마음에 잔잔함이 필요한 순간에도 영화를 찾게 된다. 영화에는 음료를 포함해서 10가지가 넘는 음식이 등장한다. 난 분명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라도 만들어서 먹고 싶어 진다.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음식이 요리를 하고 싶은 욕구와 먹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유독 나를 자극하는 것은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음식, 배추가 들어간 수제비와 배추전이다. 주인공은 차가운 눈 속에 숨어있던 알배추와 파 한 뿌리를 찾아낸다. 땅 속에서 겨울을 지나고 있던 배추와 파는 따뜻한 음식으로 변해 서울 생활에 꽁꽁 얼어버린 주인공의 몸과 마음을 녹여준다. 늦은 저녁 배부른 식사를 하고 막 불을 땐 방에 누워있는 주인공을 볼 때면 덩달아 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다.


상상을 해본다. 영화를 잠시 멈춘 채로 주방으로 가서 밀가루를 찾아 수제비 반죽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곤 알배추를 사러 마트를 가본다. 짧은 시간이지만 수제비 반죽은 조금은 숙성이 되어 쫀득쫀득 해질 것이다. 마트에서 사 온 알배추를 한 잎 한 잎 뜯어 깨끗이 씻은 후 큰 잎 2장 정도는 따로 떼어놓고 나머지는 한 입 크기로 잘라놓는다. 가스레인지에서는 멸치 조금과 다시마를 넣은 물이 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따로 빼놓은 2장의 배춧잎에 부침가루를 곱게 묻혀서 적당히 열이 오른 펜 위에 올려놓는다. 다시물이 끓기 시작한다. 약간이 얼큰함을 위해 고춧가루도 조금 넣어본다. 잘라놓은 배추를 넣은 후 밀가루 반죽을 넣고, 파를 넣고 한소끔 끓이면 완성. 수제비가 끓어가는 동안 펜에 올려두었던 배추전도 적절히 익었다. 좋아하는 그릇에 담아 수제비 한 숟가락, 배추전 한 젓가락을 먹어본다. 짧은 순간의 상상만으로 기분까지 노곤 노곤해진다.


작년 3월의 어느 주말, 약간의 비 소식이 있었지만 지나가는 비가 될 거 같아 지인들과 등산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선 등산길이라 설레었다. 사실 등산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설렘을 주는 건 산을 내려와서 먹는 부침개이다. 적당히 비를 맞았고, 배가 고팠고, 비까지 오고 있었으니 부침개를 먹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다. 겉바속촉이 여기에 있다. 겉은 살짝 갈색 빛이 돌 정도로 익어있지만, 그 속은 육즙이 나오는 거 마냥 촉촉하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배고프다고, 맛있다고 무작정 입에 넣어버리면 데일 수가 있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알쓰 중에 알쓰인 나도 이때만큼은 동동주 한잔이 하고 싶어 진다.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을 알 것 같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릴 정도로 비가 오면 집에서도 종종 부침개를 해 먹는다. 정해진 메뉴는 없다. 배추나 부추가 없으면 집에 있던 신김치를 꺼내서 김치전을 해 먹으면 된다. 3,4장 정도를 구우면 부모님과 나 셋이서 먹기에 양이 적당하다. 칼이나 가위로 잘라먹는 부침개보다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서 먹는 부침개가 2.5배는 더 맛있는 것 같다. 역시 비 오는 날에는 전을 먹어야 한다며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것이 가장 평범한 일상이 된다. 양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도 먹고 나니 제법 배가 부른 것 같다. 기름진 것을 먹었으니 후식으론 깔끔한 커피 한 잔을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날씨가 덥다. 서울은 비 난리가 났는데 여긴 도통 기미가 안 보인다. 서울에 있는 비구름을 절반만 떼서 밑으로 가져왔으면 좋겠다. 부침개 만들어 먹을 핑계라도 되게 비라도 좀 실컷 내렸으면 좋겠다.




#일상의작가

#부침개

매거진의 이전글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