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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향 Jun 04. 2023

나는 울면 안 되겠구나

울고 싶은 순간이 왜 없었을까

2015년 3월,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엄마의 병명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언니는 돌이 갓 지난 셋째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니, 나, 남동생 우리 남매는 서로에게 다정하고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평소에 전화통화를 자주 한다거나 연락을 잦게 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 당시 언니는 가까이에 살고 있었기에 굳이 전화로 안부를 물을 일도 없었다. 그런 언니가 낮 시간에 느닷없이 전화를 했다.      


언니의 목소리에는 불안함과 걱정이 담겨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니는 셋째를 출산하고 약간의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언니에게 엄마의 병은 불안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내가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구나. 나는 울면 안 되겠구나.‘


라고 결심을 한 것이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엄마의 투병이 9년 동안 이어질 줄 알았다면 그런 무모한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생각이지만 엄마의 병이 금방 나을 것이라는 큰 기대에 했던 비장하고도 위험한 결심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을 당시 언니는 각각 3살 터울의 자녀가 3명이었고, 막내가 이제 막 돌이 지났다. 남동생은 타 지역 생활을 한지 오래되었고 아버지 역시 직장인으로서 메여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도 직장을 다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쉬는 날이 월요일이고 어느 정도 배려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이기에 서울 병원 길의 대부분은 내가 함께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중증 환자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그 환자와 한 집에 같이 산다는 것은 어떻게든 정신 줄을 잘 잡고 있어야 하는 상황들이 종종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항암치료 후 오는 부작용을 견디는 엄마를 봐야 할 때, 병실에 엄마를 혼자 두고 나올 때, 열이 나는 엄마를 태우고 응급실을 가야 하는 순간,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있는 순간들이 그렇다.


9년 동안 이 모든 시간들을 보내면서 마음 놓고 정신 놓고 울고 싶은 순간들은 넘치고 넘쳤다.


누구라도 옆에서 살짝 툭 건들면 당장이라도 눈물 한 바가지를 쏟을 수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라치면 ‘OOO 보호자님’ 부르는 바람에 눈물은 쏙 들어가고 나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울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울지 않는 것이 점점 습관이 되어버렸다. 눈물이라는 것이 참으면 속에서 말라 없어질 줄 알았건만 빗물에 항아리가 가득 채워지듯 점점 차올라갔다. 그래서 더 울지 못했다. 한번 시작하면 감당이 안될 거 같아서 시작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념까지는 아니었지만 엄마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다른 일들로 엄마 앞에서 울 때는 있었지만 오롯이 아픈 엄마의 어떤 상황들 때문에 엄마 앞에서 운 적이 거의 없다. 엄마도 알고 있었다. 둘째 딸은 엄마 앞에서 울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울지 않으니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 병원엔 어제부터 언니가 상주하고 있다. 언니는 병실을 들어서면서부터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했다. 평소에도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병실에 있는 엄마를 보고선 감정을 방어할 새도 없이 눈물이 나왔을 것이다. 언니의 눈물에 엄마도 눈물바람을 보였고 둘은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하며 울고 웃었다고 했다.


그랬다. 엄마는 울고 싶었다.


엄마도 지난 시간 동안 꾸역꾸역 참아내고 눌러가며 그 울음을 삼켜버린 것이다. 언니가 엄마 앞에서 울어줘서 그렇게 같이 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래서 자식은 여러 명이 있어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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