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는 사이

by 수리
“많은 사람이 서로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 그리고 그런 피상성에 만족한다.”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처음에는 무관심에서 시작한다.


여자는 이 남자에게 정말 ‘영’의 관심도 없다. 스쳐 지나가면서 들리는 말투와 슬쩍슬쩍 보이는 행동에서 오히려 건방지다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만한 사람이라는 누명을 쓰고 이 남자는 여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우연히 카페에서 둘은 마주친다. 가벼운 목례를 잠시 교환하고 서로의 일행에게로 돌아간다. 여자는 생각한다. 역시나 재수 없는 사람이야. 모든 것에 시큰둥한 저 표정을 보니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 하는 생각도 잠시, 여자는 함께 온 일행에게 집중한다.


여자의 머릿속은 연말의 성대한 파티에 집중되어 있다. 파티 장소에 따라 달라질 드레스코드를 생각하며 인터넷 쇼핑몰의 스크롤을 내린다. 레드는 너무 강렬하고 블랙은 너무 단조롭다. 그린과 블루는 마음에 들지만 괜찮은 디자인을 고르기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인지 방 안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여자는 재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간다. 막상 나오니 어딜 가야 할지 여자는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카페에 들러 음료를 테이크아웃하고 여자는 길 건너편 공원으로 향한다. 세 트랙 중에 여자는 패턴이 있는 구불구불한 중간 트랙을 택해서 슬렁슬렁 걷는다.


여자의 생각은 연말 파티에서 시작해 통장의 잔고, 어제 읽은 책 속의 주인공, 멀리서 들리는 캐럴 소리, 오커색으로 변한 잔디로 떨어졌다가 불어오는 상쾌한 겨울바람에 떠돌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바닥 패턴을 보며 여자는 자신만의 페이스로 걷는다.


한참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이 추운 날 걷다니 저 인간도 꽤나 심각한 걱정이 있는 모양이야, 여자는 생각한다. 스쳐 지나가려 하는데 남자가 둘러쓰고 있는 후드 모자를 젖힌다. 어라, 그 남자다. 건방진 재수 없는 그 남자.


남자가 가벼운 고개 인사와 함께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건다.

말을 걸 거라 생각하지 않은 터라 여자는 꽤나 놀란다. 잠시 날씨에 대해 몇 마디 나누면서 자연스레 둘은 함께 걷게 된다. 이런 의도치 않은 만남, 게다가 그리 반갑지 않은 상대와 함께 걷게 되어 여자는 매우 불편하다.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기분으로 여자는 사회생활을 위한 표정과 말투로 자신을 단단히 여민다.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넨다.

“이 공원에 자주 오시는 줄 몰랐어요.”

여자가 답한다.

“집이랑 가까워서요. 기분 전환 겸 종종 와요.”


여자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말을 잇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하시게 되어 부담스러우시지요 요즘. 리더가 되셨잖아요.”

남자가 답한다.

“저는 원래 리더나 어떤 자리를 맡게 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해야 되니 하는 거지만 크게 욕심은 없어요.”

여자가 답한다.

“그래도 팀에 특이점이 있어서 걱정했는데 잘 이끄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남자가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답한다.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여자가 대답한다.

“아직 팀원들로부터 아무런 불만을 들은 게 없는 걸 보면 잘하고 있으신 겁니다.”


남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여자는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웃음을 터트리는 남자가 낯설다. 웃음이라고는 짓지 않을 것 같던 인간이 터트린 웃음에 어리둥절하다. 게다가 생각보다 말도 잘하고, 무게가 있지만 맑은 목소리가 의외라고 생각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는 듯이 리드미컬하게 떠돌다가,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몹시도 애쓰는 여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안구로 나와 남자의 풀린 눈에서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여자의 고막으로 돌아간다.


그 산책 이후 여자는 복도를 지날 때 멀리서 이야기하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들어온다. 남자의 존재가 인식되고 목소리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이 인간의 존재가 궁금해져서 무관심이 호기심으로 바뀌고, 떠도는 목소리가 배출되지 못하고 여자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건드리며 부유한다.


여자는 남자가 맡은 프로젝트를 어려워한다는 걸 기억해 내고는 남자를 돕고 싶다. 호기심과 호감 그 사이 어딘가 여자의 마음은 목소리와 함께 떠돈다.


여자는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간단한 아침 인사와 안부가 서로 오고 간다. 여자는 한번 먼저 다가가 보기로 한다. 조언과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 그리고 원한다면 여자가 직접 도와줄 수도 있다는 고심 하며 쓴 텍스트를 몇 번이고 확인한 후 엔터키와 함께 남자에게 보내버린다. 여자는 조바심은 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답장은 바로 오지 않는다. 분명 조금 전까지 즉각 답장을 주던 남자가, 데드라인과 구체적인 도움에 대한 손길을 내밀자 메시지를 확인조차 안 한다. 여자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애써 이해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하루 종일 메시지는 읽지 않고 남겨져 있다. 제안한 데드라인이 지났지만 여전히 메시지는 ‘읽지 않음’ 상태로 남겨져 있다.


이렇게 이틀이 지나가고 여자는 자신이 잠시 느꼈던 감정을, 남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밀려오는 배신감과 허탈함에 다시 인터넷 쇼핑몰을 스크롤한다.


많은 사람이 서로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 그리고 그런 피상성에 만족한다.


여전히 메시지는 읽지 않음으로 남아있다.




2026.01.31

수리

(cover image by Nano Ban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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