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글쓰기 모임
오랜만에 꺼내보는 연애시절 이야기는, 나름 새로움을 주네요.
그 때의 그 남자가 지금의 그 남자인가 싶긴 합니다만,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중입니다. 사심없이.
첫 직장에서 만나게 된 그 남자는 키가 컸다. 서류제출 등 단순관리직 업무를 하는 그 남자에 대해 대표님은 그 남자가 원래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 잠깐 같이 근무 중이라고 했다. 퇴사할 사람인 줄 알았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얼굴은 하얀 편에,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남아있지만 사무실 대부분에게 친절했고, 인사성이 밝았다. 첫인상이 특별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나이가 같으니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회사의 구성원은 대표님, 나, 차장님, 재택근무하는 과장님, 그리고 그 남자였다. 매일 점심을 다같이 먹었다. 이야기를 재밌게 잘 하시는 대표님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차장님이 오전 근무만 하게 되었다. 차장님 어머니의 암 투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의 점심엔 대표님, 나 그리고 그 남자와 같이 식사를 했다. 실상은 거의 외근을 나가시는 대표님 덕분에 거의 매일 그 남자랑 점심을 먹었다.
어색한 분위기도 싫고, 나이도 같으니 친구처럼 지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로 친해져야 하니, 점심시간에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직 사회초년생이었으니 이미지관리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터라, 내 이야기의 팔 할은 실수한 이야기, 술마신 이야기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기는 한데, 아무튼 그랬다. 그 결과로 동갑내기 여자 변리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고민했던 그 남자는 그렇게 경계심을 풀게 되었다고 했다.
그 남자는 내가 알던 남사친들과 많이 다르게, 순박한 시골총각같기도 한, 시대에 맞지 않는 느낌이 컸다. 대표님 말에 따르면, 수의사와 소개팅을 시켜주었는데 자신의 꿈이 귀농임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왔다고 했다. 또 자기 발로 익혀야 길을 안다면서 운동삼아 수서역에서 서울역까지 걸었다고 했다. 당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호기심이 많이 생기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야간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일주일에 이삼일은 한두시간 정도 일찍 퇴근을 했고, 남은 날들은 야근을 했다. 그래서 대학원을 가지 않는 날에는 그 남자랑 점심도, 저녁도 같이 먹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웃기는 데 진심을 다했다. 그 때의 나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호기심이 나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대표님은 워크숍 등의 행사에 다녀오라고 하면서 그 남자도 같이 가라고 했다. 나름 영업맨으로 키울 심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대표님은 그 남자에게 한 마디를 더 했다. "집에 데려다주고 가~"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 남자랑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고, 일 있으면 같이 가고, 끝나면 그 남자가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 남자와 행사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대화를 할 때는, '아! 너무 키 큰 남자는 만나면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키 차이가 30cm 이상이라, 내 입장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을 올려다보듯 쳐다보면서 대화해야 해서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회사는 계속해서 나에게 그 남자와의 연애를 부추기고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그렇게 그 남자에 대한 호기심은 호감으로 변해갔다.
어느 일요일, 대학원 과제물을 하러 회사에 갔다가, 과제물을 하게 된 나의 실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 남자를 웃겨주었고, 과제물에 대한 어려움도 토로했더니, 과제물을 대신 해준다고 했다. 과제물을 해결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옳다구나!'하고 넘겼다. 대가로 나는 그 남자에게 밥도 사고 술도 샀다. 내 과제물이 버거웠던 그 남자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밥도 사고 술도 사며 나의 과제물을 뿌리고 회수하여 나에게 전해주었다. 과제물을 잘 제출하고 한 학기를 잘 마친 후, 회사 밖에서 영화 약속을 잡으며 그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왜 과제물을 해주겠다고 했는지 물었다. 뭔가 달콤한 멘트를 기대했지만, 그 남자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주말에 출근했다면 개인 사무를 볼 것이 아니라 회사일을 해야 마땅하고, 그것이 인건비에 부합하니까 대신 해주었다고 말이다. 사심은 절대로 없다고 했다. 그 남자의 '사심없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 남자는 몰랐을 것이다. 사심없이 같이 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열어보이는 것, 사심없이 누군가의 퇴근길을 같이 해준다는 것, 사심없이 누군가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준다는 것은, 사심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사심을 가득 만들어가며 연애가 시작된 후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심없음'은 중요하다. 일상을 함께하는 동안 사심없이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고, 일상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나갈 때, 사심을 여전히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