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글쓰기 모임
1. 여자 이야기
오랜 수험기간을 거쳐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녀의 경쟁력은 하위권이었고, 규모가 크고 괜찮은 특허법인에는 취직하지 못했다. 그렇게 동기들보다 늦게 매우 작은 특허사무소에 취직했다. 사회 첫 직장이었고 기대가 컸기에, 사무소 규모나 처우, 사수의 유무 등 불만족 사유는 차고 넘쳤다. 다만 그 회사도 어렵게 들어간 터라 이직을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친한 언니와 퇴근 후 만나기로 했다. 강남역 근처에서 만나 저녁도 먹고 교보문고도 가고 차도 한 잔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 언니는 사회초년생의 치기어린 불만, 어처구니 없는 불평도 공감하며 잘 들어주었다. 그 날은 그렇게 기분 좋게 마무리를 했다. 이후 이십일 쯤 근무한 다음, 수습변리사들 대상으로 하는 한 달간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던 어느 날 그녀는 그 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기가 아는 변리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이다(그 언니는 대학교 산학협력단에 근무하여 거래하고 있는 특허사무소 변리사들을 많이 알았다). 괜찮다고 거절했어도 됐는데, 그러겠다고 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언니와 함께 어느 작은 특허사무소 대표님과 식사를 했다. 일단 만났으니 준비해간 이력서도 전해드렸다. 그 자리에서 무슨 얘길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선배변리사로서의 조언이나 수험기간 등 가볍게 서로를 탐색하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그녀는 그 변리사님으로부터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냉큼 오케이를 하고, 이직을 했다. 이직한 그 회사에서 입사 3개월 만에 사내 연애를 시작하여 22개월만에 결혼을 하고, 2년 만에 퇴사를 했다.
그 언니를 만났던 날, 그런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언니가 그 얘기를 잘 들어준 걸로 대화를 마무리했다면, 그녀는 아마 지금 여기, 부산에 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2. 남자 이야기
성적은 우수했지만 공부가 싫었다.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모범생으로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반발을 해보았다. 공고에 진학하고 얼른 취업하겠다고. 베트남 전쟁 참전에, 원양어선도 탔고, 중동근로자도로 근무했던 강인한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는 지원을 할 테니 졸업하면 부자의 연을 끊자고 하셨다.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또 모범생인 척 살다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버지는 재수를 권했지만, 행정고시 또는 사법고시를 보겠다며 재수를 하지 않았다. 공부를 또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대학에 가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려고는 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주변에 고시 공부하던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학습법도 이해도도 부족함을 느꼈다. 역시나 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래도 시험을 보고 그만두어야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1차 시험을 치르고 포기를 선언했다.
군대를 다녀와서 학점을 관리하고 취업을 준비했다. 마지막 학기를 포함해 근 2년을 준비했으나 결국 취업하지 못했다. 잘 나가던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좌절감도 들었다. 점점 폐인같은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선배이자 친구의 친형인 변리사 형님이 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특허사무소에서 알바를 하라고 했다. 그리 중요한 일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모범생 기질을 발휘하여 성실하게 다녔다. 다들 얼마 안 있어 나갈 줄 알았는데 오래 다닌다고 생각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러다 동갑내기 여자 변리사가 들어왔다. 어색하고 불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비혼주의였던 그는 결국 그 여자 변리사와 결혼했다. 알바나 잠깐 하려던 그 특허사무소가 결국 그를 결혼에 이르게 했다.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온 그 알바에 대해 그가 후회하는지는 잘 모른다. 분명한 건 그 알바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3. 선택
그녀와 그의 결혼은, 그들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는 언니, 그의 아는 변리사 형님의 선택도 한 몫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녀와 그의 가족들의 선택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건 결국 각자의 삶을 선택하고, 서로의 삶에 엮이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살다보면 그녀는 자신의 선택은 잊고 남 탓을 하곤 한다.
‘내가 그 날 그 언니만 안 만났어도......’
그는 누구 탓을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