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을 안 써도 알 수 있는 얼굴인데...
부산시에서 하는 리크루팅 행사에 참석했다. 회사마다 주어진 구인 부스에 앉아 관심 있는 구직자들이 이력서도 제출하고 상담도 하는 행사다. 사무실에 제출되는 이력서도 보고, 면접도 진행해 봤지만 리크루팅 행사에는 처음 참석해 봤다. 요즘 애들이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가질까, 그래도 한 두 명은 오겠지,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방인 데다, 잘 알려지지 않은 리크루팅 행사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학의 취업정보센터 담당자들이 와서 안면을 익혔을 뿐이다.
상담하는 구직자도 없고 해서, 가지고 간 노트북으로 급한 일들을 처리하며 한참을 앉아 있는데, 누군가 내 앞에 와서 앉았다. 연배가 나보다 위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젊게 보아도 50대인 아저씨다. 상담을 할 마음의 준비를 하며 말을 건넸는데, 자신은 관상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차 싶었지만, 심심한 차에 얘기나 들어볼까 싶은 생각도 들어, 그 관상가 양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요약하자면, 지금 내가 관상을 맛보기로 봐주겠다. 맛보기로 보는 것에 돈을 좀 내서 들어보고, 관심이 있으면 돈을 좀 더 내고 들으면 된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한 3만 원 정도 예상하며, 심심하니까 한 번 들어나 보자고 했다. 그렇게 얘기한 내가 분명 호구 같아 보였을 것이고, 그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그 관상가 양반은 5만 원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호구처럼 5만 원을 주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사실,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뭔가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그런 기대. 물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그 관상가 양반이 나에게 해 준 이야기는 착하게 생겼다는 게 다였다. 남에게 모진 말도 못 하고, 무언가 단칼에 자르는 일을 못할 것이니, 그런 일이 생기면 자신을 고문처럼 전문가처럼 활용하라고 했다. 그분의 구직활동이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별다른 대꾸를 할 게 없어서 웃었더니, 자기가 웃겨준 것만도 5만 원은 될 것이라고 했다. 듣다 못한 내가 뭐 더 해줄 말은 없냐고 했더니 기왕이면 살을 좀 빼라고 했다.
결국 내가 5만 원에 들은 이야기는 착하게 생겼다는 것이었고, 잘 웃어서 보기가 좋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를 보고 못되게 생겼다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잘 웃으니 어둡고 우울하고 그늘져 보이는 것도 없다. 어디 하나 뾰족하게 생긴 구석도 없고 둥글둥글하게 생겼다. 그렇다. 굳이 관상을 보지 않아도 내가 착하게 생겼다는 것은 매우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게다가 통통보다 뚱뚱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 살을 좀 빼면 사는 게 더 나을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도 알고 나를 보는 사람도 아는 나의 이미지를 5만 원을 주고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갖고 싶은 이미지가 있다. 나는 착하게 생긴, 모범생 같은 그런 이미지 말고, 소위 카리스마 있는 멋진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그렇지만 관상가 양반이 말하듯 정말 착하게 생겨서인지, 잘 웃어서인지 나에게 그런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게 나는 늘 아쉽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해 왔으면,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발설하면 안 되었다.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니 그저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리쿠르팅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면서 부끄러우니까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바로, 사무실 회식에서 무용담처럼 직원들에게 얘기하고 웃었다. 진짜 호구되었다면서.
아마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에 남기지 않고 싶은 마음이 우선 컸던 것 같다. 거기에 내 얘기를 듣는 직원들이 나를 좀 챙겨주었으면 하는, 사랑과 관심을 원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부끄러운 나도 받아들이는 어른스러운 태도, 직원들에게 보여야 할 권위 있는 태도는 나를 극복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나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호구 같은 이야기를 팔아 그들의 선의를 끌어내고자 했던 나는, 또다시 너무 착하고 잘 속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더했을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카톡 프로필에 "吾喪我(오상아)"라고 기록해 뒀었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라는 뜻이다. 깨달은 나(吾)가 기존의 자아(我)를 극복한다는, 지금까지 원래 자기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 태어난다라는 의미이다. 지난 8월, 공동 대표변리사로 취임하면서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써놓은 프로필이었다. 아직 나를 극복하기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착한 호구는 이제 그만해야겠다. 이 일 말고도 정말 충분히 많았으니 말이다.
금자오상아(今者吾喪我). 이제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