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알지 못해도 괜찮았었기 때문
오늘은 다소 도발적인 주제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정부정책이 현실과 괴리되는 구조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정부는 수많은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 중에 '이건 정말 필요했던 부분인데!', '와! 이런 것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반응을 한 정책의 비율은 얼마나 되실까요?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렇게 비율이 높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정부정책이 현실성을 띄지 못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한 번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제 아이는 아직 돌도 되지 못하여 엄마아빠 말조차 못하는 아기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은 울음이고, 아이의 울음에 저는 곧바로 달려가 반응합니다.
한 번 상상해보겠습니다.
저희 아기가 수많은 아기들 사이에서 울고 있을 때 저는 제 아기의 울음을 알아채 수 있을까요?
알아챌겁니다.
설령 울음소리가 다른 아기들의 울음 소리에 파묻히더라도 적어도 제 눈은 제 아이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 아기가 속하지 않은 수많은 아기들 중의 철수와 영희가 울고 있고 그걸 제가 인지했더라도 저는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 아기도 아닌 아기를 케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해당 부모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며 자칫하면 유괴범 같은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를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또는 여당관계자로, 아기를 도움이 절실한 국민(정책대상자)로 치환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만약 제 아기라고 생각을 하면 그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쓰여서 견딜수가 없을 것입니다.
집에 있는 동안 눈에서 떼지 않음은 물론 출근하고 나서도 틈틈이 CCTV로 지켜보거나 아내나 시터분께 연락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아기임에도 수많은 아기 중 하나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는 그 아기가 제 아기인지 모른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산부인과의 실수로 아기가 뒤바뀌어서 제 친자식과 제 아기로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아기가 둘이서 나란히 누워 울고 있다고 할 때, 저는 제 친자식이 아닌 제 아기로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의 아기를 챙기러 가지 않겠습니까?
저는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내 아기를 돌봐야 하는데도 그 의무를 저버린 공직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충분히 어려운 국민들을 돕겠다는 사명감이 충만한 다수의 정책결정자가 있음에도 그들이 내가 돌봐야 하는 바로 그 아기의 울음소리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또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길거리에서 침을 잘 뱉던 사람도 자기집 안방에서도 침을 뱉는다는 사람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한 이유입니다.
길거리에서는 침을 뱉어도 그걸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지만, 자기집에서 뱉은 침은 온전히 자기가 치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공유지의 비극입니다.
길거리에서 침을 뱉으면 자기도 손해 아니냐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특정다수의 집단화입니다.
길거리를 이용하는 사람이 100명이라고 가정할 때,
내가 길거리에서 침을 뱉으면 그 손해는 나를 포한한 100명에게 돌아가기에 내 손해는 1/100로 희석되는 반면, 내가 만약 나서서 남이 길거리에 뱉은 침을 청소하면 그 이익 또한 고스란히 100명에게 돌아가기에 내게는 1/100의 이익이 되는 셈입니다.
내 집에 침을 뱉는 것은 그 손해가 온전히 나에게 돌아오며 내 집에 침을 뱉지 않고 깨끗하게 쓰는 것의 이익 또한 온전히 내게로만 돌아옵니다.
이제 이것을 정책대상자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정책이 너무 부당해도 개인은 나서서 해결해볼 생각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반 개인의 입장에서는 성공확률도 불확실한데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멀리는 박종철, 전태일 열사의 부모님부터 가까이는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 발전소 김용균씨, 민식이법과 세월호 사건 등에서 보듯 사무치는 억울함을 가지게 된 부모님들은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그 해결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노력의 결실은 그 일에 직접적으로 힘을 보태지 않았던 저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렇게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공론화가 되기만 하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어 해결되지 않는가? 최근에만 해도 정인이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망 이후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씀입니다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정인이 사건에 대한 해결책에서 근본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부분들을 우리 사회는 정말로 하고 있나요?
더 적나라하게 까고 말해서 "돈"을 투입해서 진지하게 해결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말입니다.
사기업이 되었건 정부조직이 되었건 "예산"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업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정인이 얘기는 다른 곳에서 그간 많이 다루었고 저 또한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정책대상자인 국민 입장에서는 왜 불특정다수에서 특정한 개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느냐? 정책결정자들의 눈에 띄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느냐? 그런 점에 대해서는 일응의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어서는 정책결정자들 입장에서 한 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입니다.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정책결정자들의 고객은 국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그럴까요?
정책결정자들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분명히 국민을 위해 정책을 펼치려는 사람들의 비율이 분명히 사리사욕을 펼치려는 사람보다는 비율적으로 더 높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앞서 2번에서 말씀드린 이유 등으로 인해 불특정다수화되어 있는 정책대상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는데에는 현실의 벽이 존재합니다.
물론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각종 통계조사도 하고 여론기관의 설문조사도 참고하고 때로는 의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결국은 개인이 통계집단화된 것이라 생생한 정책대상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그럼 어떻게 개인화된 목소리를 직간접적으로 청취하는가?
제 생각에는 몇 가지 방법과 루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 정치인
2. 기자 등 언론
3. 교수 등 해당분야 전문가
4. 시민단체
5. 이익단체
6. 민원인
7.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지인들
이 중 그래도 순수한 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루트는 6, 7번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원인의 경우 이익단체나 해당사안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카페나 SNS 등을 통해 조직적, 반복적으로 민원을 넣는 경우도 적지않게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개인화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6번의 민원인, 7번의 지인들의 경우 대표성이 없다는 것이 한계로 작동합니다.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과대하게 대표성을 가질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그 분포가 균등한지도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윗사람에게 보고하거나 정책입안에 직접적으로 반영, 고려하는 경우는 대개 1~5로 한정됩니다.
문제는 1~5를 통해 전달되는 정책대상자인 국민들의 목소리는 날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책결정을 위한 자료로 쓰이기 위해서 정돈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겠습니다만, 그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1~5를 통해 전달되는 국민의 목소리는 1) 애초에 편향적이거나, 2) 일부의 목소리만 과다하게 대표되었거나, 3) 아예 실제 현실과 정반대의 목소리일 가능성까지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1의 정치인부터 5의 이익단체에 이르기까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특정단체와 일종의 경제적공동체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정치인은 정책결정자와 똑같은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보좌관들조차 제가 사는 아파트 세대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얘기를 듣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들이 소통하는 것은 후원회, 아파트 부녀회, 지역내 단체 등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를 쌓은 단체는 다음 선거에서 든든한 지원세력이 됩니다.
기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소속언론사의 논조라는 것이 존재하며 광고주인 기업체의 영향이나 구독자들의 성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교수 등 해당분야 전문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연구를 수주하고 논문을 게재하고 어디 기고문이라도 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이해관계자와 완전히 척을 지는 날선 비판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민단체가 그래도 가장 중립적이고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위안부 문제에서 보여지듯 시민단체 또한 관료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익단체는 태생부터가 소속 회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굳이 다언이 필요치 않습니다.
정책결정자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정책대상자들을 개인화하지 못하고 진짜로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구조적인 한계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의 경우 그런 관심조차 없거나 아니면 특정단체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경우까지도 있는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2019.3.29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제도가 변경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누구나 청원게시글을 올릴 수 있던 것이 100명 이상의 사전동의를 거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청와대는 그 이유로 미국 백악관의 위더피플도 150명 이상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 이를 통해 청와대 국민청원의 신뢰도와 소통효과를 높이고 악성민원을 막을 수 있다고도 설명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조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인구는 3.28억명(2019년 기준)이고, 우리나라 인구는 5,182만명(2021년 기준)으로 약 6배의 차이가 나는데 사전청원인 수를 2/3인 100명으로 한 것이 맞는지도 의문이지만...
무엇보다 만약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당초부터 위와 같은 제한이 있었다면 그 사이에 20만 명의 공감을 얻어 답변이 이뤄지고 사회적 관심이 환기되는 청원들이 올라올 수 있었을까가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2019.3.29. 이전에 20만명 이상을 모아 답변된 청원의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억울한 사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20만을 상회한 것입니다.
단순히 그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만이 아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제도적 개선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데이트 폭력, 어린이집의 아동학대, 음주운전 처벌 강화 등입니다.
물론 청와대의 설명도 이해는 됩니다.
무분별하고 낙서장 같은 게시판 운영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청와대 청원을 올리는 것도 100명을 어떻게든 구해오지 않으면 글조차 쓸 수 없다는 것은, 국민의 호소권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제도를 개선한 사람은 '인터넷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려서 정말 억울하면 100명은 금방 모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미 여론화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수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분들에게 100명은 아무것도 아닌 숫자인지 모르겠으나, 임금근로자의 87.9%가 354만개의 중소기업에서 근로하고 있으며 중소기업당 평균 근로자 수는 4.6명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100명은 그리 간단한 숫자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야말로 민원인의 개인화된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20만이라는 청원동의를 통해 대표성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제도라고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제도를 앞으로도 기술을 활용하여 보완하고 유지,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정부나 정치관계자들이 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