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끼리도 정치얘기는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주제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청년, 중년끼리 정치얘기를 하더라도 전혀 말이 씨알도 안 먹히는 수준까지 가는 경우는 아주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70대 이상의 친부모, 장인장모, 직장 임원들과 어쩌다 정치얘기를 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도대체 소통의 실마리도 찾아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실 때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를 저도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는데 답은 하나였습니다.
지금 70세인 분들은 1954년, 79세인 분들은 1945년에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이 분들이 태어난 이 시기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70대들이 좀 크고 기억에 남을 때가 된 10대 후반에 대한민국은 1964년에서 1973년이었습니다.
이건 순전히 근거없는 저의 뇌피셜인데 인간의 사상, 신념에 후천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가 있다면 청소년기에서 20대까지가 아닌가 합니다.
그 때 만난 선생님, 친구, 동료, 사회분위기 등이 어떤 사람의 인생관에서부터 정치관, 역사관까지 형성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단 그렇다고 가정하고 본다면 70대에게 그 시기는 1965년에서부터 1983년이 됩니다.
이 때 대한민국은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인 독재정부 시절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최빈국을 벗어나 개발도상국에 들어가고 중진국에 한창 진입하기 위해 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70대에게 30대는 1975년에서 1993년이 됩니다.
그 당시의 대한민국의 드라마틱한 경제성장,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의 승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인한 자부심 상승 등 그야말로 하면 된다의 정신으로 하루하루가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은 결혼도 일찍 하고 아이도 일찍 낳았으니 1945년생의 경우 이미 대학을 다니는 자녀가 있을수도 있고, 1954년생의 경우도 자녀가 중학교 정도는 충분히 진학했을 나이가 됩니다.
70대에게 40대는 도전과 시련의 계절이었을 것입니다.
1985년부터 2003년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는 있지만, 1945년생은 1997년 IMF 당시 52세로 다니던 직장에 구조조정이 있다면 제1순위로 이름을 올렸을 것이고, 1954년생 또한 IMF 시점에 43세로 구조조정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저앉고 무너진 70대도 있겠지만, 구조조정으로 본의 아니게 자영업으로 밀려났더라도 잘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노력했으면 그 이후에 잘 풀릴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인구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어 인구보너스를 누리고 있었고 iMF 구조조정 요구는 분명히 지나치게 가혹하고 필요 이상으로 엄격해 미국의 양털깍이가 의심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잉생산을 해소한 면이 있어 살아남은 기업들은 급속도로 시장을 장악하고 수출을 늘리며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입니다.(독과점 폐혜는 이 때 씨앗이 뿌려진 것일테지만요)
1995년부터 2013년, 70대는 50대를 보내게 됩니다.
50대면 기업에서는 부장, 임원, 사장을 하고 학계에서는 이미 경력을 쌓고 자리를 잡은 교수, 사업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을만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여파를 겪기는 했으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비교적 양호하게 지나갔고,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면 대한민국은 그래도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삼성이 이 시기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우뚝섰습니다.
저도 기억하는 일이지만, 일본 소니는 감히 우리가 쳐다도 보지 못하는 기업이었습니다.
삼성이 일본의 소니를 제친다고 말하면 미친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70대 모두가 삼성전자를 다녔을리는 만무하지만, 한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50대를 그 시기에 보낸 70대에게 자부심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의 70대는 2005년부터 2023년까지 60대를 보내게 됩니다.
가장 빠른 1945년생은 2005년에 60이 되어 2014년에 69세가 되었고, 1954년생도 2014년에 60대를 시작합니다.
비극의 씨앗은 바로 여기, 이 지점입니다.
대한민국은 2010년을 전후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70대는 이 시기를 은퇴 전후로 맞게 되면서 본인들이 현역으로 활동할 때와 세상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달라졌는지를 이해하려야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적 상황을 맞았습니다.
2010년을 전후로 대한민국에서 달라진 것을 단 한 마디로만 표현하라면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대한민국의 성공공식, 성공모델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빈국에서 중진국 함정을 넘어서기까지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에는 일종의 암묵적 대전제가 있었습니다.
"없는 살림에 남을 빨리 따라잡아 먹고 살아야 하니, 큰 아들(대기업)에게 집안의 모든 역량을 몰빵한다! 큰아들은 그렇게 받은 지원으로 돈을 벌어와 네 밑에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먹여살려라!"
1980년의 제조업 기준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가 얼마였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불과 9%였습니다.
즉, 대기업 근로자가 500만원을 받는다면, 중소기업 근로자도 455만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https://saesayon.org/wp-content/uploads/2016/12/Saesayon_hellkorea202.pdf
그 이후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는 지속적으로 벌어집니다.
85년에는 83.9%, 90년에는 73.9%, 95년에는 71.2%, IMF 이후인 2000년에는 65%로 떨어졌고 현재도 이 수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3년의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는 58.7%입니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2D7VV1T40E
그런데 제 글의 흐름을 잘 따라오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런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좋다. 당신 말이 맞다고 치자. 근데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는 1985년애 이미 하락을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에 이미 50%대로 들어갔는데 왜 2010년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고 하는가?"
그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70대는 이런 변화를 체감하기가 아마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던 1985년에 70대는 이미 40대였습니다.
임금격차가 벌어진다고 해도 당시 기준에 40대면 빠르면 팀장, 부장도 되었을 나이인데 그들의 임금이 깍이는 일은 일단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당시만 해도 그나마 격차가 낮았으니 상승도 여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50대로 임원급들이었테니(회사에 여전히 남아있고 IMF를 견뎌냈다면) 역시 이런 변화를 몸으로 느끼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경우 당시만 해도 일찍일찍 낳았으니 1945년생이 1965년부터 낳은 자녀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성인이 되어 취업을 했을 것이고, 대기업-중소기업 임금 격차가 벌어지고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경제성장에 따라 절대적인 임금수준은 상승했을 것입니다.
일본처럼 장기 디플레이션을 거치며 실질 임금상승이 거의 없는 가운데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가 벌어지기만 했다면, 그 당시 마이카, 마이홈 붐 등이 설명되지 않겠지요.
결국 본인들을 통해서도, 자녀들을 통해서도 70대는 그러한 변화를 체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두번째로 방금 언급한 것처럼 대기업-중소기업 임금격차 등 과거 대한민국 성공공식의 구조적 문제점과 폐혜가 문제로 된 순간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장기간에 걸쳐 나타납니다.
그 임계점을 저 개인적으로는 2010년 이후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가지 않는 이유는 방금 보여드린 임금격차 외에 산재노동자의 소속기업이 어디인가의 통계 등을 봐도 명백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인생경로를 살아온 70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본인들은 실제로 중소기업을 들어가서도 잘만 살았으니까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로 70대들은 단칸방, 삯월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도 많이 낳고 잘 키웠지요.
젊은이들은 70대의 경험이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와 지금의 변화를 말하는데 이 부분 역시 70대는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념적으로도 70대는 태어나서부터 1991년 소련이 무너질때까지 철두철미한 반공교육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이승복 어린이 사건, 무장공비 침투사건, 김신조 사건 등 북한의 실제적인 위협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국방을 충실히 하자는 것과 빨갱이 몰이는 사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국방을 충실히 하면서 경직되고 편향된 북한관, 통일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70대에게는 이것도 어렵습니다.
내 경험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최빈국에서 태어나 선진국 초입까지 우리나라를 성장시켰다는 성공경험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경험하지 못했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과거에는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는 것을 강요합니다.
70대의 헌신과 그간의 성공에 대한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과(얼마든지 그럴 용의가 저를 포함한 젊은이들에게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달라진 세태에 다른 해법을 내놓는 것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닌, 양립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70대는 그걸 구분하지 못합니다.
달라진 세상에 대한 설명으로 기존의 성공공식이 맞지 않음을, 그 방법론에 대한 부정이 아닌 그들 자신 내지는 그들의 성공경험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합니다.
이 부분이 70대가 인류 역사상 유일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후세에 유효적절하게 전하지 못하고 70대를 제외한 다른 세대로부터 점점 고립되어가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