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읽는 사람은 세 번을 던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번째가 관우가 죽을 때이고,
두번째가 유비가 죽을 때이고,
마지막이 제갈양이 죽을 때라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인공이 패배하는 클리셰의 최고봉은 삼국지의 유비일지 모릅니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하여 형주를 확보하고 익주를 얻고 한중에서 처음으로 전면전으로 붙은 조조를 패퇴시키며 드디어 유비가 천하를 통일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나 하던 찰나 날아든 관우의 죽음은 뒷통수를 세게 후려맞는 느낌이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삼국지에 나름 빠져 살았고 당시 나온 삼국지 서적을 대략 4~50권은 읽었지만 관우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꺼림칙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스스로 관우의 최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재구성해보았습니다.
관우가 죽은 부분의 정사 삼국지 기술입니다.
「權使呂蒙襲奪荊州,虜羽子平及部將杜濩等,羽自麥城走,為馬忠所獲,遂徙都秣陵,斬羽與平於臨沮。」
“손권은 여몽을 보내 형주를 기습하게 하여 관우의 아들 관평과 장수 두활 등을 포로로 잡았다. 관우는 맥성에서 달아났다가 마충에게 붙잡혔고, 결국 임저에서 참수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글자는 為馬忠所獲입니다.
당시 중국 사서에서는 전투 중 사망은 "殺, 戮, 斬, 死"을 쓰고 항복은 "降"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면 획(獲)은 무엇이냐?
획은 일반적으로 생포하다란 뜻으로 쓰이며 所獲은 사로잡힌 자라는 피동형 표현이라고 합니다.
만약 관우가 일정한 병력을 이끌고 있던 시점에 포위를 탈출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면 "殺, 戮, 斬, 死"이 쓰였을 것인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격전을 벌인 후에 스스로 자결한 것일까요?
항우의 최후를 묘사한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於是項王乃自刎而死。」
“이에 항왕(항우)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自刎", 자문,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는 그런 표현이 관우에게는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전투중에 사망하거나 항우처럼 스스로 자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병력입니다.
군대와 군대 단위의 전쟁을 하기 위해 최소한 천 이상의 단위로 구성된 군대가 있어야 전투를 벌이다 사망하거나 최소한 자결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항우는 해하에서 마지막 싸움을 할 때 800명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관우는 조조가 천도를 고려할 정도로 강성한 위세를 자랑하다 단 일순간에 최후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19년 7월 ─ 관우 번성 포위 개시 (수공)
↓
219년 8월 ─ 우금 7군 침몰, 방덕 전사 → 조조 천도 검토
↓
219년 9월 ─ 서황 출병, 격전 후 포위망 해제 → 관우 후퇴
↓
219년 10월 ─ 여몽 형주 기습 → 후방 상실
↓
219년 12월 ─ 관우 맥성 후퇴 → 포로 → 참수
이 모든 것이 불과 5개월만이 일어났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상 관우의 마지막 전투기록은 219년 9월 서황에게 당한 패배입니다.
이 패배는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 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면 서황이 추격을 게속하여 219년 12월이 아니라 219년 9월이나 10월 시점에 관우가 전투중 참수되거나 했을텐데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관유는 219년 9월 시점에는 적어도 패배는 했으나 군을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19년 10월 어느 시점엔가 관우는 형주의 상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관우가 선택할 수 있는 이론상의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1. 서황을 격파하고 양양과 번성을 점령한다.
2. 여몽을 격퇴하고 형주를 되찾는다.
3. 익주로 후퇴한다.
그런데 사실 관우는 이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고 그 결과가 두 달 후의 생포, 참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번은 관우가 서황에게 패하고 포위를 푼 시점에서 이미 사라진 선택지였습니다.
더욱이 형주가 건재하면 모를까 형주를 잃은 상태에서는 적진에 고립된 상황이니 당연히 말도 안되는 선택지입니다.
이제 2번과 3번인데, 관우 입장에서 아직 군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3번은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비에 대한 의리, 융중대 계책을 알고 있는 상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형주를 맡은 입장에서 바로 3번을 택해 익주로 도망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관우는 2번 여몽을 격파하고 형주를 되찾는다는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반증해주는 것으로는 관우의 도망이 219년 10월이 아니란 점입니다.
만약 관우가 219년 10월 시점에 3번 익주 후퇴를 선택했다면 반드시 전투가 10~12월 사이에 있었을 것이고 기록에 남지 않았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전투도 없고 2달간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갑자기 2달 뒤 관우는 맥성에서 달아나다 사로잡혀 죽었는가?
여기서는 형주군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형주는 유비가 209년 공안을 접수하며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219년이면 유비가 형주를 통치하고 10년이 된 해입니다.
인덕의 유비로 알고 있지만, 10년동안 유비가 형주민들에게 우리나라, 우리 군주라는 인식을 확고부동하게 심어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유비, 유선 부자가 60년이나 통치한 촉나라가 멸망할 때 초주와 같은 익주 출신 호족, 관료들이 성도 무혈개성을 권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10년밖에 안된, 더욱이 전란의 중심에 서있던 형주에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즉, 당시 관우가 거느리던 형주병은 주로 형주출신 징집병으로서 유비가 익주정벌에 끌고간 예전부터의 베테랑, 유비 개인 내지는 유비정권에 충성하는 성격의 병사들은 이미 익주에 들어가있고 형주에는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 생각에는 만약 이들이 형주에 하다못해 1,000명만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관우는 이들을 이끌며 어떻게든 익주로 탈출하는 것 자체는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그전부터 유비군은 생존의 스패셜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처럼 연이은 패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모여 유비에게 종군했던 충성심 높은 군대였습니다.
아마 형주를 점령한 여몽군이 생각보다 자기 가족들을 후대한다는 말을 듣자, 자기들 입장에서는 지배자가 촉으로 바뀌건 오로 바뀌건 지배당한다는 것은 어차피 같으니 굳이 자기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명, 두 명 연이은 탈영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어졌는지 모릅니다.
또한 형주징집병 출신인 이들을 이끌고 익주로 후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들 입장에서는 형주의 자기 가족들은 후대받고 있는데 관우를 따라 익주에 들어갈 이유도 없고, 익주에서 언제 귀환할 수 있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습니다.
또 하나의 힌트는 군량입니다.
관우는 우금의 3만군을 수몰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손권의 곡식창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이 여몽의 습격으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국가 대전략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하지는 않겠죠.
다만, 형주상실로 더 이상 군량보급이 없어진 상태에서 양양과 번성의 함락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면 관우군은 당장 보급곤란에도 직면했을 것입니다.
물론 세세한 실제 사정은 누구도 모릅니다.
탈영이 연이어 이어지다 자연히 관우가 이끌던 3~5만으로 추정되던 형주군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 관우가 군을 해산했는지 그런 디테일은 남아있지 않고 추측하기도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관우가 반장에게 생포된 것은 알겠는데 반장이 우세한 군으로 갑자기 급습해서 미처 대처하거나 자결할 틈도 없이 사로잡혔는지, 아니면 관우가 잠든 사이에 종자가 배반했는지 우리는 세세한 사정을 아무것도 모릅니다.
장비가 잠을 자다 범강, 장달에게 목이 달아난 것처럼 어쩌면 관우도 피곤에 절어 잠시 쉬는 사이에 관우를 내다판 부하를 통해 반장에게 잡혔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