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기 어려운 진심

실수가 실패는 아니다

by 서윤

백색의 빈 바틀이 내 눈 앞에서 현란하게 몸을 던지고 있다. 허공에서 2~3바퀴를 돌아 M형의 손아귀에 안전하게 착지하는 것은 기본이요, 뒤에서 던져진 바틀이 M형의 등과 어깨를 타고 돌아 앞으로 오기도 하며 3개의 바틀이 동시에 하늘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평상시 플레어를 즐기지 않는 M형이 이렇게 분주하게 스킬을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꽤나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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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어」란 바텐더가 바틀을 포함한 각종 기구를 이용하여 묘기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불쇼가 바로 이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지금도 주변에 플레어 바를 찾아가 보면 바텐더가 묘기를 부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바도 그와 마찬가지로 모던 플레어 바다. 바텐더가 플레어를 하는 모습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M형의 그런 모습이 의외라고 여겨진 이유는 그가 평소에 플레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바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진행하는 칵테일 쇼에서도 메인은 언제나 사장님과 S형이었지 M형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공연 출장을 나갈 때 남아 있는 바를 지키는 것도 언제나 M형의 몫이었다.


M형이 쇼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엉망이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다르겠지만 일반 손님이 보기에 M형의 손놀림 또한 S형 못지않게 화려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기에도 충분하다. 다만 운명의 장난과 같이 연습할 때의 모습보다 실전에서의 결과가 눈에 띄게 안 좋을 뿐이다. 나아지지 않는 긴장감과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하락한 자신감이 플레어 바틀을 M의 손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침부터 플레어를 연습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오늘은 외국에 살고 있는 그의 여자친구가 3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오는 날. 오래간만에 만나는 여자친구에게 그는 무슨 이벤트를 해줘야 하나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바로 그녀만을 위한 칵테일 쇼였던 것이다.



진짜 몇 개월 만에 다시 잡아보는 건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져본 바틀은 그에게 낯설 수밖에 없었고 그 실력 또한 이전보다 서툴렀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는 연습 속에서 실력은 본래의 기량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나의 호응 속에서 M형의 자신감도 약간 회복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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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M형의 여자친구분이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바 문을 열었다. 오래 떨어져 있던 연인의 감격적인 재회는 그 반가움을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M형은 카운터 밖으로 튀어나가 그녀와 포옹했다. 함께 온 친구들의 지속적인 눈치가 아니었다면 연인 간의 긴 대화는 끝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과도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M형은 다시 카운터 바 안으로 들어와 그의 이벤트를 준비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와중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 특별한 손님이 자리해주셨기 때문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지금부터 즐거운 칵테일 쇼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카운터 바 쪽으로 가까이 와주시면 감사하겠으며 가장 열정적으로 호응을 해주신 분들에게는 10만 원 상당의 칵테일을 서비스로…….



잠깐의 안내 방송과 함께 칵테일 쇼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크게 흘러나왔다. 연습할 때보다 더욱 긴장된 표정의 그는 첫 번째 바틀을 들어 하늘 위로 던졌고 바틀은 M형의 등 뒤로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와 그의 반대편 손으로 안전하게 착지…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M형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춘 채 준비된 나머지 레퍼토리들을 이어나갔다. 어느 정도 폼을 되찾은 후에는 큰 실수 없이 쇼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중간중간에 발생하는 간간한 실수들이 그에게는 너무나 심리적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바틀을 떨어뜨리기도, 중간중간 다음 동작을 까먹어 버벅거리기도 하던 그는 마지막 불쇼를 끝으로 가까스로 쇼를 마무리지었다.



오늘은 밤새 깡소주나 들이켜야겠다. 윤아, 너는 나랑 같이 마셔줘야 돼.


M형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티니, 올드패션드, 맨해튼과 같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칵테일 중에 하나인 네그로니는 진, 스위트 베르무트, 캄파리를 같은 비율로 섞어 마지막에 오렌지 껍질로 가니시해주면 완성된다. 네그로니 백작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이 칵테일은 드라이한 진과 향기로운 스위트 베르무트, 그리고 쌉쌀한 캄파리가 어우러져 어른의 맛을 낸다. 어느 칵테일 바에 가든 메뉴판에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칵테일이니만큼 그 선택으로 인해서 후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네그로니.jpg 네그로니 칵테일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칵테일임에도 조주를 함에 있어서 바텐더는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1970년대 밀란 바바쏘의 바텐더 미르코 스토케토는 아주 바쁜 어느 날 밤에 진이 있어야 할 자리에 프로세코를 잘못 두어 네그로니가 아닌 완전히 잘못된 칵테일을 만들어 버렸다. '네그로니 스발리아토'라는 이름을 가진 이 칵테일은 이탈리아어로 직역하면 '잘못 만들어진 네그로니'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 의미와는 다르게 오히려 이 실수로 인하여 네그로니 스발리아토는 좀 더 가볍고 탄산이 있는, 완성도 높은 칵테일로 그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연인에게 늘상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줄 수는 없는 법이다. 또한 야속하게도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진심을 담아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면 할수록 더 잦은 실수를 하곤 한다. 마치 수십 번 준비한 고백이 상대의 얼굴 앞에서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네그로니 스발리아토와 같이 잘못된 실수를 더 사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실수 속에서 상대방의 진정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너무 완벽한 사람에게는 정이 가지 않듯이 우리는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에게 더 이끌리고 불완전한 사람에게 더 강한 감정을 느낀다.


그날 밤 나는 M형과 깡소주를 들이키러 가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M형이 오랜만에 만난 여자친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실수가 부끄러웠던 M이지만 그의 그런 실수들마저도 여자친구에게는 귀엽게 보였나 보다. 네그로니 스발리아토는 역시 실패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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