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존재하는가
그 날의 새벽은 유난히 추웠다. 졸린 눈을 비비고 기숙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꺼내니 다른 친구들도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어제 미리 생각해둔 데로 서랍에서 두통약을 꺼내 필통 안에 넣었고 잠시 눈을 감은 상태로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날이다.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한 나는 바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급식실로 향했다.
아침 식사는 작년 선배들 때와 마찬가지로 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혹시나 배가 아파 시험 중간중간 화장실에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항상 전통 재래시장처럼 시끄럽던 여느 때의 급식실과 다르게 오늘의 급식실은 매우 조용했다. 서로가 서로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기 위해 말조심을 하는 눈치였다.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들. 자연스럽게 들리는 작은 소음임에도 우리에겐 무서울 정도로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급식실을 나와 소운동장으로 나가니 친한 후배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윤이 형, 수능 대박 나세요!"
후배들 앞에 서니 반드시 수능을 잘 치르고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와 긴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는 대형 버스를 타기 전 후배들 하나하나의 눈을 마주치며 격려한 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누구 하나 매일 같이 해오던 그 흔한 농담조차 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군가는 의자 위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했고 다른 누군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고 기도했다. 나는 잠을 자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자기 최면을 하기 시작했다. 졸리지 않다. 피곤하지 않다. 나는 매우 멀쩡한 정신으로 수능을 볼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나에게 최고의 찍기 운을 하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수능 시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지난 3년간 매일 함께했던 선생님들이 미리 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해 어리바리한 신입생으로 적응하는데 고생한 내가 이제는 어느새 3학년이 되어 수능 시험장에서 선생님들의 격려를 받는다니!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느끼며 시간의 경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선생님들과 진한 포옹을 한 뒤 모두 모여 큰 목소리로 수능 대박을 외쳤다.
"우리는 큰 그릇, 수능 대박, 파이팅!"
다시 이 정문을 나설 때에는 무척 홀가분한 기분 이리라. 나는 선생님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결전을 위해 시험장에 들어갔다.
내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나는 가방에서 평소에 공부하던 공책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두통이 잠시 찾아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를 무시한 채 요약 필기노트를 펼쳤다. 너무나 익숙한 글씨들. 수없이 여러 번 봐온 내용들이었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초침과 분침이 내 심장을 조여왔다. 곧 있으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능이 시작되리라.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님 얼굴에 미소를 띠워드리고 싶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부모님에게 기쁜 목소리로 수능 대박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다.
잠시 후 요란스레 울리는 예비종이 곧 결전의 순간이 시작됨을 알렸다. 떨리는 심장소리. 감독관의 지시 하에 우리는 필기도구와 신분증 외 모든 소지품들을 집어넣었고 시험지와 답안지를 받은 후 시작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시선은 오직 시계만을 향했다. 제발 잘 보게 해 주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잠재능력과 운을 오늘 이 순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마침내 첫 번째 시험인 국어영역의 시작. 시험지 첫 장을 넘기니 너무도 익숙한 화법 유형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빠르게 눈을 움직여 첫 번째 지문을 다 읽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방금 읽은 지문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시작부터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 다시 지문을 빠르게 읽고 문제를 풀려고 해도 지문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마치 내 머리가 고장이 나 버린 것만 같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고 주위에서 시험지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감으로라도 문제를 풀고 시험지 첫 페이지를 넘겼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고질병인 두통이었다. 나는 필통에 미리 챙겨둔 두통약을 확인했다. 그냥 먹는 게 나을까? 하지만 막상 먹으려고 하니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약의 수면 성분이 걱정되었다. 괜히 이걸 먹었다가 오늘 시험 보는 내내 졸리지는 않을까?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약을 먹는 것을 포기하고 문제를 다시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이나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시작부터 뒤쳐졌으니 남들보다 빠르게 풀어야 한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시험지 넘기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빠르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국어는 감이 중요하니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풀면 분명히 백점이 나올 것이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긍정적인 마음을 먹고자 노력했다.
모든 국어문제를 다 풀고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풀었는지 평상시보다 10분이나 문제를 빠르게 푼 것이다. 나는 우선 OMR 답안지와 가답안지를 정리한 뒤 너무 빠르게 풀어 제대로 확인 못한 지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여전히 잘 읽히지가 않았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다 보니 곧이어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첫 번째 시험이 끝나니 시험장은 세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었다. 시험 답을 친구들과 맞혀보는 사람과 차분히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얼굴이 상기된 사람. 나는 세 번째 유형에 가까웠다. 8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고 이게 정말 내가 수년간 준비해온 시험인 것인지 의아했다. 갑자기 머리가 강하게 아파왔다.
나는 바람을 쐬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시험장과는 다른 상쾌한 공기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조금 머리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저 멀리서 내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국어··· 잘 봤어?"
역시나 친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두통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금 머리가 너무 아프지만 수면 성분이 있을까 봐 약을 먹지 못하겠다. 친구들도 먹지 않고 그냥 볼 것을 권유했다. 고민 끝에 나는 이 상태로 나머지 시험들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다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다른 시험은 몰라도 수학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6, 9월 평가원 모의고사 모두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은 데다 가장 어려운 고난도 문제들도 계속 고민하고 풀어보면 시험 종료 직전까지는 모두 풀렸기 때문이다. 시간적 여유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시험지를 넘겼다.
그러나 문제를 풀던 도중 예견된 고비를 맞이했다. 두뇌회전이 많이 필요한 고난도 문제에 돌입하니 점점 두통이 심해져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집중을 하려 하면 머리가 쪼개질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배점이 큰 4점 문제들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수학공식들을 사용해 빠르게 문제풀이를 하다 시험지가 책상 틈에 끼어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절반쯤 찢어졌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눈 앞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어떤 생각을 하려고만 하면 머리가 아파와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험 종료를 10분 정도 남기고 고난도 문제 3문제를 붙들며 계속 고민했다. 6, 9평 때처럼 기적과 같이 풀이법이 떠오르기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3문제를 거의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답안지를 제출했다.
"오늘 시험 나쁘지 않지 않았냐? 국어는 조금 쉬웠던 것 같은데."
"나도 그냥 무난했던 것 같애. 아 맞다, 수학 21번에 4번 맞지?"
수학 시험을 마치고 급식실로 향하는 길. 앞뒤 친구들은 앞서 본 국어와 수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입을 다문채 조용히 식사만 해야 했다. 아무 걱정 없이 떠드는 것 같은 친구들을 보며 녀석들의 성적을 예측해 보았다. 저렇게 밝게 웃는 것을 보니 저 녀석은 분명 시험을 잘 본 걸 거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쓸쓸한 마음 때문에 나는 급식실에 더 있지 못하고 수저를 놓은 채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고등학교 3년간 같은 반이었던 만큼 각별한 친구와 학교 교정을 산책했다. 지금까지 본시험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남은 시험에 대한 불안감. 서로의 감정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나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기분이 괜찮아졌다. 우리는 점심식사 시간이 모두 끝날 때까지 서로의 긴장을 풀어주고 응원해주었다.
식사 이후에 봐야 할 시험은 내가 가장 걱정스러워하는 영어 과목이었다. 심지어 올해 수능 영어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극에 달했다. 자리에 앉아 영어 시험지 앞면을 보고 있는 상태로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영어 듣기 방송이 울리자 위의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나는 초긴장상태에 돌입했다. 아직 1번 문제가 시작되지도 않았음에도 안내 방송 소리와 함께 주위에서 시험지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중간중간에 쉬운 난이도의 주제 찾기 유형 문제를 풀기 위함이다. 청해 능력이 부족하기에 나는 이런 방식의 문제풀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올해 영어시험의 난이도가 어려워 시험시간이 부족할 것이 분명해 보인 데다 주위에서 이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조급함이 생겨 나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듣기 문제를 미리 풀고 남은 다이얼로그가 진행되는 동안 뒤에 있는 지문을 읽어두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13번 듣기 계산문제를 미리 풀고 뒷장에 있는 문제를 푸는 도중 큰 혼란이 찾아왔다. 제대로 듣지는 못했으나 얼핏 들은 듣기 문제의 뒷 대화 내용이 내가 방금 체크한 답을 정정해야만 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생각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처음 체크한 답을 그대로 밀고 나갈지 아니면 뒤에 들은 내용이 맞다고 생각하고 정답을 바꿔야 할지 바로 결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다음 문제인 14번 문제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일단 정신을 차여야 했다. 나는 뒤에 있는 지문을 미리 푸는 것을 포기하고 나머지 시간을 듣기 문제를 푸는데 집중했다. 17번까지의 모든 듣기 문제를 풀고 난 뒤 나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슬픈 고민에 빠졌다. 이미 두 개의 듣기 문제를 놓친 상황에서 나머지 문제들을 잘 푼다한들 과연 내가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을까? 이미 내가 꿈꾸던 대학들과는 많이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영어시험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대로 무척이나 어려웠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영어 시험까지 모두 마친 뒤 쉬는 시간이 되자 귀에 이어 플러그를 꽂고 조용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주요 과목 시험이 모두 끝나고 나니 긴장감은 거의 사라졌고 이제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빨리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수험생이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수능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나머지 탐구과목과 제2 외국어 시험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지나갔다. 함께 시험 보는 다른 수험생들도 영어시험이 끝나니 이미 긴장이 풀린 듯했다. 나 또한 이미 끝났다는 해방감과 함께 나머지 시험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풀었다. 마지막 시험인 제2외국어마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몇몇 아이들은 탄식을 내질렀고 또 다른 몇몇은 상기된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수능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만약 수능이 끝난다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해본 적이 있다. 해방감? 기쁨? 환희? 수능 결과와는 상관없이 수능이 끝나는 그 순간 수능 이전과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수능이 끝나니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능이 끝난 그 순간 나를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은 오히려 허무함과 허탈함이었다. 이게 정말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수능인가? 그냥 평소와 같이 항상 보아오던 모의고사를 풀고 나온 기분이었다. 수능이 끝났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수능 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학교로 돌아가는 동안 버스 안은 매우 조용했다. 그중에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친구도 있었고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멍한 상태로 좌석에 앉아 버스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시험을 잘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태껏 봐온 모의고사 성적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막연한 자신감이 그나마 나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학교로 돌아와 버스에서 내려 교실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2, 3층에 있던 후배들이 창문을 통해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우리들 중 몇몇은 이에 크게 반응해주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후배들에게 호응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교실에 들어가 앉아 잠시 대기하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나 수능 관련된 이야기뿐이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우리는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수능 가답안지를 채점하기 위해 컴퓨터실로 향했다.
내 차례가 되어 드디어 컴퓨터 앞에 앉자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주 접속하던 인터넷 강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수능 채점 배너를 클릭했다. 새롭게 뜬 창에는 각 과목별 문항 번호가 쓰여있었고 나는 가답안지를 보며 문항 옆에 내가 체크한 답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모든 문항을 다 채우고 채점 버튼을 누르기 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저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마우스 커서로 채점 버튼을 클릭하고 수능 성적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나라한 나의 채점 결과. 나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과 가답안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시 홀수형, 짝수형을 잘못 보지는 않았는지, 문항과 나의 답안을 잘못 연결 짓지는 않았는지 내가 본 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것은 내 성적이 분명했다. 컴퓨터실을 조용히 나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교정을 걸으며 숨을 들이켰다. 겨울의 공기는 너무나 차가웠다. 폐 속 구석구석까지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입김이 닿은 밤하늘은 별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뗐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라는 말. 그 단어 하나를 힘겹게 말하고는 난 울음이 터졌다. 옆에 누가 보든 말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서럽게 계속 울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눈물만 계속 흘렀다. 나는 그 날 밤새도록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