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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집은 왜 이렇게 작아?

by 서윤

"아빠! 이 글자는 뭐라고 읽어요?"

"사람 인(人)이라고 읽어. '인간'할 때 그 '인'자란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소싯적에 서당에서 훈장을 하셨다고 한다. 글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시며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존경받는 어르신으로 인정받았고 자식들을 가르치는 것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우리 아버지 또한 아주 어릴 때부터 나와 동생에게 한자를 가르치셨다.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남들은 한창 영어 조기교육 열풍으로 영어 유치원, 영어 학원을 보낼 때에 왜 한자를 가르쳤는지 의아하겠지만 우리 부모님은 아이의 교육이나 최신 트렌드에 대해 그리 귀가 밝지 않으셨다. 그저 당신들이 어릴 적 받았던 교육을 자식에게 그대로 가르친 것이거나 국어 단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자어를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리라.


우리 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바로 가세가 기울어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이미 환갑이 넘어 경제활동 능력이 부족했던 홀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나 등록금을 내지 못해 고등학교를 중퇴하셔야만 했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당신들의 학업에 대한 콤플렉스는 매우 심각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을 만나면 항상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셨을 정도이니 말이다.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매년 초 작성하는 가족관계 조사서에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 옆 각각 중졸, 고졸을 적는 것이 부모님은 무척이나 부끄러우셨다고 한다. 나는 그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부모님의 오랜 콤플렉스는 곧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나 다름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우연히 받은 반 1등이라는 성적에 부모님은 나에게서 가능성을 보셨다. 좋은 대학교를 나오면 무엇이 좋은지, 왜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나를 이해시키려 노력하셨다. 물론 어린 내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내 성적을 보고 기뻐하시는 부모님이 좋았다. 내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찾은 것이었으니까.



어린 내가 공부를 잘하고 싶었던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첫째는 아까 말했듯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것이었고 둘째는 가난한 우리 집안을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일으키고 싶은 것이었다. 가난이 지독하게 잔인한 점은 대를 거듭해도 나아질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철없고 어린아이조차도 가난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던 난 또래 친구들의 악의 없는 한 마디에도 큰 상처를 받았다.



"너희 집은 왜 이렇게 작아?"


조부모님 대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을 그나마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하지 않게 일으킨 부모님이었지만 남들이 볼 때는 괜찮아 보일 리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학원을 다니느라 바쁘게 오고 갈 때 나는 부모님에게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가 죄송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놀이터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밥때가 되었음을 알려주시면 그제야 나는 작고 초라한 집에 돌아갔다.


다행인 점은 부모님께서 나에게 유복한 환경은 만들어주지 못하셨더라도 혼자서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많이 만들어주셨다는 것이다. 만학의 꿈을 꾸신 아버지께서는 퇴근 이후에도 매일 방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셨다. 학생도 아니고 어엿한 직장을 가진 아버지께서도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데 나라고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아버지를 따라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은 그렇게 들여졌다.


"큐(Q)의 소문자가 뭘까?"

"소문자요······?"



초등학교 6학년 여름까지 알파벳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나를 보자 부모님은 그제야 다급해지셨다. 중학교에 가면 영어 시험도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6학년 여름방학, 처음으로 학원이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고액의 영어 학원은 비싼 만큼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 아니, 내 실력이 모자란 만큼 그만한 본전을 뽑았다고나 할까.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도 구분 못하는 내가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계속 영어 조기교육을 받아 온 또래 친구들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매 수업시간마다 보는 성과 테스트에 나는 항상 낙제점을 받았고 그에 대한 벌로 수업 후 따로 보 충 수업을 받아 매일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삼각김밥과 친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영어학원을 통해서 1년 가까이 영어에만 집중한 결과 간신히 중학교 내신시험 수준의 영어 실력은 터득할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내신에'만' 몰두했다. 눈 앞에 보이는 성적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다. 자녀 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였거나 학업 성취에 큰 흥미를 지닌 나였다면 조금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양쪽 다 그러지 못했다. 나는 얼추 괜찮게 나오는 내 성적을 보며 한없이 자만했다. 애초에 한 반에 공부하는 학생 자체가 절반도 안 되는 교실에서 말이다.


나의 과목별 공부 시간은 수학이나 미술이나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내신 성적에 있어서는 어차피 두 과목 다 같은 백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습량이나 성취에 필요한 투자 시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예체능 과목에도 동일한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해야 손쉽게 등수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잘못된 공부 시간의 배분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불안한 성적이라는 결과로써 그 문제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공식만 대입하면 풀리는 수학 문제들이 추가적인 사고력을 요구하는 문제들로 바뀌어 꽤 우등생이었던 나까지 어렵게 느껴진 것이다. 항상 백점만 받아오던 수학을 89점이라는,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받으니 나에게는 충격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때, 그 심각성을 미리 깨달았더라면 고등학교에 와서 그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일시적으로 실수한 것이겠거니 하며 가볍게 넘겼다.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나는 흔히 말하는 특목고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외고, 자사고, 과학고 등 똑똑한 아이들만 모여있는 그곳에 가면 나의 견문을 넓힐 수 있을 것이요, 무엇보다 그들처럼 좋은 대하게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가장 먼저 우리 지역에 있으면서 좋은 대학 입시 성적을 자랑하는 용인외고에 관심을 가졌다.


용인외고는 듣던 대로 굉장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식 건물에 뷔페와 같은 화려한 급식, 故 앙드레김이 디자인한 예쁜 교복과 공부하기 너무나 좋은 환경은 나의 수험생활을 바치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는 용인외고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알아보며 조금씩 꿈을 키웠다.

그러나 용인외고를 진학하는데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아무리 용인외고가 자사고로 전환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외고에 진학할 만큼 영어능력이 특출 나지 못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용인외고의 값비싼 등록금과 학원·과외비를 우리 가족이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학 입시 성적이 좋다한들 대학교 등록금 만한 금액을 고등학생 때 내야 하는 학교를 갈 능력이 우리 가족에겐 없었다.



"윤아, 혹시 한일고등학교라고 들어봤니?"


첫 번째 목표를 상실하여 기운이 없는 나에게 어머니는 다른 고등학교 하나를 소개해주셨다. 충청남도에 위치한 시골 고등학교. 외고, 자사고와 같은 특목고는 아니더라도 전국에서 학생을 모집하는 기숙사 고등학교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고등학교 치고는 대학입시 성적도 꽤 준수했고 무엇보다 학교 자체적으로 학생들이 학원에 다니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님의 사교육비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는 점이 좋았다.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고등학교가 없을 정도로 최적의 학교였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고입 준비에 몰두했다. 고등학교 입학설명회를 통해 어떤 인재상을 요구하는지 확인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진단했다. 객관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 학교에 가고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해 3월, 나는 신입생으로서 학교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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