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D Day A Day

입학 백일제

부모님께서는 그때, 처음으로

by 서윤

우리 고등학교는 갓 입학한 신입생들을 부모님의 곁으로부터 철저히 독립시키기 위해 100일간 면회·귀향을 막는다. 가족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공중전화. 그래서인지 매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엔 전화카드를 손에 들고 공중전화 박스 앞에 길게 줄 지어 서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렇게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입학 후 100일이 되면 학교에서 가족들을 초청하여 입학 이래 가장 큰 행사를 연다. 그것이 바로 「입학 백일제」. 가족들과 처음으로 떨어져 그동안 못 봤던 얼굴들을 다시 확인하며 성공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알리는 행사다. 당연히 우리 학생들에겐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입학 백일제를 앞둔 한 달 전부터 우리는 행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들은 부모님께 바치는 노래를 준비했고 춤을 잘 추는 친구들을 분위기를 띄울 안무를 준비했으며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친구들은 합주 무대를 준비했다.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갖가지 화려한 재주들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와 같이 특별한 재주가 없는 사람은 행사를 위한 각종 물품들을 나르는데 온 힘을 써야만 했지만.


행사 당일, 저 멀리서부터 매우 익숙한 승용차가 보였다. 벌써 10년째 간신히 엔진의 동력을 유지하고 있는 검은색 구식 카렌스. 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무척이나 보고 싶던 그리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로 이별한 지 어언 3개월.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게 되니 고생한 지난날들이 떠오르며 기쁜 마음에 가족들을 와락 껴안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는 부모님과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다 행사가 진행되는 소극장으로 향했다. 소극장은 이미 가족과 함께 앉아 있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노래, 춤 등 우리가 준비한 다채로운 행사들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함께한 모두가 백일제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지막 순서인 학생 대표와 학부모 대표의 편지 낭독은 친구들과 그 가족들의 여린 가슴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 우리는 다 같이 모여 수능을 보는 그 날을 위해 굳건한 각오를 다졌다. 자랑스러운 한일인이 되어 선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배, 후배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선배가 되자고.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자 드디어 부모님과의 첫 면회 외출 시간이 주어졌다. 소극장을 가득 메웠던 인원들이 행사가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잽싸게 소극장을 빠져나와 부모님께서 미리 예약해놓으신 식당에 가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배가 터지도록 목구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 날만큼은 평소의 먹던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위가 능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이후로 그만큼 한꺼번에 많이 집어 먹은 것은 훈련소 수료식 면회 때 말고는 없을 것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면회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운 마음과 함께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소운동장에 차를 주차하고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무렵 먼저 교실로 돌아가고 있던 친구가 뒤에 있는 나를 보곤 가볍게 말을 던졌다.


"윤아, 빨리 교실로 돌아가야지. 너는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하잖아."


부모님께서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인지하셨다고 한다. 공부를 못해서, 친구들보다 많이 부족해서 지금까지 겪어왔던 어려운 나날들을 부모님이 알아채시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나 신경 써왔는데 그간의 노력들이 모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으셨지만 부모님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교실로 뛰어올라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나는 교실에 앉아 책을 펴기 전 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친구들과 비슷한 수준에 오르자. 그리고 적어도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모님을 민망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는 말자. 그것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선배들과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