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야 했을 유럽 배낭여행. 자기 덩치만 한 백 팩을 메고 있던 3명의 청년은 이탈리아 공항 비행기 앞에서 잔뜩 긴장된 모습으로 승무원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챙겨둔 여권과 항공권을 손에 꼭 쥐며 우리는 태연한 척 초조함을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이마와 등에서 흐르는 식은땀까지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외국인 승무원. 승무원에게 여권을 건네며 나는 두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린 것은 지난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였다. 행복한 식사 후에 우리는 미리 예매한 스페인행 항공권을 인쇄하기 위해 PC cafe에 들어섰다. 길게 늘어선 구식 모니터와 그 한쪽 구석에 홀로 쓸쓸히 놓여있는 프린터기. PC cafe는 몇 없는 이용자로 인해 매우 평화로웠지만 곧이어 인쇄되어 나오는 항공권을 보며 우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이 평화를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Nationality: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주주의인 Democratic과 공화국인 Republic에 속아 북한의 국제명칭을 우리 대한민국으로 착각하고 잘못 예매해버린 것이다. 비행기 탑승 하루 전 날이기에 수정도 불가했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부랴부랴 다른 항공편을 알아보았으나 짧은 시간 동안 갑작스러운 티켓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는 당장 숙소로 돌아와 때 아닌 긴급회의에 돌입했다. 지금이라도 여행 계획을 바꾸고 이탈리아에서 하루를 더 체류할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하늘에 맡긴 채 당당히 정면돌파를 시도할 것인가. 방금까지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여행이 한순간의 착각으로 인하여 걱정과 불안으로 얼룩져버리고 말았다.
상기된 표정의 청년 3명은 오랜 고민 끝에 후자인 정면돌파를 택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하필 북한이라니!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서 우리들은 갑작스레 간첩이 되어버린 어리둥절한 현실을 뒤로한 채 타국의 국적을 가지고 비행기 탑승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야 만 것이다.
승무원이 나의 여권과 항공권을 번갈아 확인하는 긴장감 최고조의 상황. 승무원의 눈동자는 두 가지 증명서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들키지 말아라! 한동안 여권에 눈을 떼지 않던 승무원이 마침내 내 눈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Come in!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다행히도 승무원이 국적이 다른 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한 듯했다. 나는 크게 안도하며 스페인행 비행기에 빠르게 올라탔고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유럽에서의 남은 여행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칵테일 보드카 마티니
영화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바텐더에게 칵테일 한 잔을 특별하게 주문한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보드카 마티니」는 킹스맨과 같은 다른 첩보 영화에서도 자주 오마주 될 만큼 유명한 칵테일이 되었다.
보드카 1과 1/2온스, 드라이 베르무트 1/2온스를 셰이커로 섞은 뒤 레몬 필과 함께 칵테일글라스에 넣어주면 완성되는 이 칵테일이 그 날 밤 문득 떠올랐던 건 과연 우연일까? 잠깐이었지만 국적까지 속여가며 비밀리에 출국했던 일이 나에게는 앞으로도 없을 긴장감 최고조의 사건임을 확신한다. 언젠가 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를 상상하며. 이를 업으로 삼아 사회에 숨겨져 있는 곳곳에서 지금도 악전고투하고 있을, 얼굴도, 이름도 없는 이들에게 약간의 존경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