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에서 여자를 꼬시기란

플레이 보이의 작업주

by 서윤

보드카 1oz 와 오렌지 주스 3oz. 고작 두 가지 재료밖에 들어가지 않는 이 간단한 칵테일은 사람들에게 '스크류 드라이버'라고 불린다. 특이한 이름을 듣고선 관심이 생기는 독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른 칵테일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칵테일에 그런 이름이 붙게된 것에도 나름의 일화가 있다.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된 이후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들은 자신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술을 곁에 둘 수 없었다. 같은 애주가로서 느끼기를, 악법 중에 이런 악법도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금주령이 그러했듯 아무리 목숨이 달려있다하더라도 애주가들의 술을 향한 집념 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정부에게 걸리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오랫동안 강구했고 그렇게해서 마침내 탄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 칵테일, 스크류 드라이버가. 보드카 약간과 오렌지 주스를 넣고 스크류 드라이버로 잽싸게 저어서 마시면 외관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일반 오렌지 주스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법망을 피해 술을 마시고자 하는 선배 애주가님들이 고민 끝에 만들어낸 환상적인 칵테일 레시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조상님들의 삶의 지혜가 묻어있는 칵테일에는 사실 또 다른 별칭이 숨어있다. '플레이 보이'. 흔히 작업주라고 불리는 이 술은 예로부터 작업을 걸고자 하는 남자가 작업을 걸고 싶은 여자를 취하게 만드는 데에 더러 쓰였다. 비주얼이 오렌지 주스와 똑같을뿐더러 맛도 일반 주스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작업남으로부터 건네 받은 이 칵테일을 순진한 아가씨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벌컥 들이켰고 결국 작업당한 아가씨들은 보드카의 높은 알콜로 인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가히 레이디 킬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요즘에 와서까지 이 칵테일을 작업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보기 힘들다. 우리 나라의 바 문화가 그리 발달하지 않아 칵테일 이면의 속뜻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 뿐더러 이제는 굳이 스크류 드라이버를 쓰지 않더라도 여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화려하고 달콤한 칵테일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플레이 보이로서의 스크류 드라이버가 가진 위상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작업주의 위상이 떨어졌다고 해서 여성을 갈구하는 남성의 본능까지 약화된 것은 아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수컷은 언제나 을의 입장에 서서 암컷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XY 유전자는 상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를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고 XX 유전자는 그런 XY 중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한 개체를 선택하여 짝을 맺는다. 남자들은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의 섭리는 태초부터 그렇게 이루어져 있었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불가역적인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물은 오직 인간일 뿐이라며 인간이라는 종족을 다른 생물보다 위대한 종족으로 평가했지만 '종족 번식'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분위기가 잔뜩 무르익은 바의 모습은 TV에서 보던 동물의 세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니 말이다. 수컷은 바의 분위기를 살피며 점차 암컷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암컷은 수컷들의 행동을 미리 눈치챘음에도 그들과 필요 이상의 거리를 두려고 하지는 않는다. 곁눈질로 수컷들의 말과 행동을 눈여겨볼 뿐이다.


바텐더는 손님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강하게 풍겨오는 수컷의 향기와 은은하게 내비치는 암컷의 기운까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테이블이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바 안 쪽에서 홀을 바라보면 숨길 수 없는 남녀 간의 긴장감과 이유모를 끌림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뒤에서 주류를 정리하며 조용히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남자가 본격적으로 맘에 드는 여자에게 관심을 표현할 때엔 눈에 띄는 자신감과 더불어 약간의 허세가 가미된다. 특히 바는 이러한 남자들의 허세가 활용되기 참 좋은 장소다. 칵테일에 대한 지식을 조금 가지고 있다거나 술에 관한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바에서만 쓰이는 용어를 몇 개 사용함으로써 무지한 여성에게 나름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마시고 있는 칵테일의 레시피를 괜시리 읊어 본다거나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의 취향에 걸맞은 칵테일을 추천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텐더가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수컷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다거나 블랙 러시안에 보드카 대신 진을 넣어달라는 식의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 주문을 한다해도 수컷과 암컷의 관계에 개입하지 않고 철저히 제 3자 역할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마티니에 럼이 들어가면 어떻고 모히또에 위스키가 들어가면 어떠랴! 바텐더는 바를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기에 손님이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굳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려는 욕구를 해소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담과 이브의 운명적 만남을 가능케한 에덴 동산의 정원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수컷의 모든 구애 활동을 마냥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명만 걸려라는 식의 수신자 없는 메시지를 마구 뿌려대는 손님은 도덕적인 관점에서나 바 관리 차원에서의 입장에서나 매장 분위기를 완전히 흐려놓기 때문에 바텐더로서도 상당히 곤란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지만 그들도 손님은 손님이기에 월급쟁이에 불과한 내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처지다. 발정난 손님에겐 남몰래 칵테일 잔 안에 성욕감퇴제라도 넣고 싶은 심정이다.


플레이 보이의 무자비한 사냥 시도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 바의 주인, 바의 데우스 오브 마키나, 바의 절대자. 바로 사장님이다. 바 분위기에 위해되는 행동을 하는 껄떡쇠를 유심히 지켜본 사장님은 문제가 생기겠다 싶으면 단호히 그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 역시 사장은 사장. 월급쟁이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가엾은 샐러리맨은 진상이 없길 기도하며 무수한 남녀들 앞에서 쉐이커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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