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사람을 향한 가난한 청년의 동경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나가사와는 「위대한 개츠비」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소설 속 나가사와의 삶을 떠올려보면 유사하게나마 그 뜻을 추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잘생긴 외모와 부유한 환경,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내가 남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각종 사치와 유흥을 즐긴다. 그런 면에 있어서 개츠비와 나가사와의 삶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개츠비의 삶을 꿈꾼다.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할 것 같은 부, 모두가 존경하는 명예, 마치 천국에 온 것만 같은 유흥 등 '개츠비'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개츠비의 삶'을 동경하게 만드는 이유다. 하지만 내가 개츠비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여자만을 평생 변함없이 사랑할 정도로 순정적인 마음을 가졌다는 점과 세상의 모든 술을 집 안에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저택을 가졌다는 사실. 만약 나도 그처럼 큰 집을 가졌다면 거대한 냉장고 안을 전부 술로 가득 채웠을 텐데! 모르긴 몰라도 개츠비가 영화상에서 주인공을 향해 뻗은 칵테일은 칵테일의 황제라 불리는 마티니일 것임이 분명하다. (원룸에서의 힘겨운 자취가 집에 대한 애착을 만든걸지도)
그래서일까. 나는 칵테일 바에서 칵테일이 아닌 다른 일반 양주를 주문하는 손님을 보면 왠지 모를 동경심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바틀 채로 주문할 때는 저 비싼 술을 어쩜 저렇게 과감하게 주문할까 하는 놀라움. 스트레이트로 주문할 때는 한 모금에 만 원 가까운 돈이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눈뜨고 지켜볼 수 있을까 하는 신비로움. 아무튼 나는 손님이 무엇을 어떻게 주문하느냐를 보고 그 사람의 재력을 혼자 점쳐보곤 했다.
이 단골손님은 동료 견습 바텐더로 인해 처음 알게 됐다. 동료의 친한 지인은 그는 본래 동료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지만 금세 바의 매력에 빠져 발걸음을 자주 이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나와 친해진 계기도 신기했다. 처음에는 동료의 지인 소개로 서로 통성명을 하며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그의 여자 친구가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이었고 그와 내가 공유하는 관심사도 여럿 같았다. 직장 동료의 친구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나와 친구였던 것 마냥 손님과 나는 친해졌다. 그리고는 때때로 동료 없이 홀로 나를 찾기 위해 바를 찾아오는 경우도 생겼다.
깔끔한 외모, 자신감 넘치는 제스처 등 그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재력가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어느 정도의 뒷배경이 받쳐준 모양이다. 해외 유학파인 그는 술을 주문하는 데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메뉴판을 주면 주문에 따른 가격을 한 번쯤 확인해볼 법도 한데 그는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그저 맛보고 싶거나 맛있어 보이면 주문할 뿐이었다.
하루는 카운터 바 앞에 그가 혼자 칵테일을 마시며 앉아있었다. 바텐더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가 모처럼 찾아왔는데 그날따라 주문이 밀려 이곳저곳 불려 다니느라 시간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단골 또한 내가 여기저기 서비스하느라 바쁘니 여간 심심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그는 주문을 하겠다며 나를 불러 세웠다.
칵테일 말고 다른 술을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그에게 메뉴판의 다른 부분을 펼쳐 보였다. 그는 메뉴판을 쓱 훑어보더니 손가락으로 데낄라 하나를 짚었다. 호세 쿠엘보 에스페샬 레포사도. '테킬라'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브랜드인 호세 쿠엘보의 제품들 중 스트레이트로 먹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테킬라다. 황금색의 빛깔이 테킬라를 고급스러워 보이게 하는 매력을 주지만 칵테일 바에서 스트레이트를 주문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므로 그의 주문에 다소 의아했다. 단 2, 3초 만에 사라지는 천 원짜리 지폐 여덟 장. 굳이 칵테일 바에서 왜 스트레이트를 주문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그 다운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 따위 그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서윤 씨 것도 하나 주문할 테니 같이 마셔요.
사양하기에는 내가 술을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다들 바쁘게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술을 마시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바텐더가 술을 마시며 일하는 것은 굉장히 흔한 일이지만 아직 견습에 불과한 나는 그런 것조차도 신경 쓰였다. 결국 나는 손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조금 더 바가 잠잠해지면 그때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참을성은 별로 없는가 보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그는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도 다 한 잔씩 사면 되는거죠?
이게 말로만 듣던 골든벨인가. 나의 생계형 두뇌는 스트레이트를 쏘는 것보다 바틀로 사서 나누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을 본능적으로 해냈지만 이내 손님에게 그런 계산은 관심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그의 주문에 따라 바텐더는 10잔이 넘는 스트레이트를 서비스했고 우리 모두는 레포사도의 황금빛을 맛보았다.
그의 배려 아닌 배려 덕에 그날도 단골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손님과 우리 바텐더들은 그 이후로도 더욱 친해져 영업이 끝나고도 따로 만나 술까지 마시는 사이가 되었으니.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칵테일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부자가 된 듯한 '밀리언 달러'라는 레시피가 존재한다. 드라이진 1과 1/2온스, 스위트 베르무트 1/2온스, 파인애플 주스 1/2온스, 그레나딘 시럽 1 티스푼, 계란 흰자 1개 분을 셰이커에 모두 넣어 셰이크 한다. 그리고 붉은빛의 화려한 혼합물을 칵테일글라스에 담아 파인애플로 장식하면 백만 달러의 화려함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입 안을 가득 덮는 부드러움은 부가 제공하는 여유로움을 맛으로나마 만끽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언제쯤 개츠비처럼, 그 단골손님처럼 부유함을 느껴볼 수 있을까? 물론 지금의 월급으로는 택도 없다. 하지만 이런 나일지라도 밀리언 달러의 꿈을 꾸는 것 정도는 허락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여전히 로또도 사지 않으면서 로또 1등 당첨을 꿈꾼다.
글을 다 쓰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한 것은 나가사와가 단순히 개츠비의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정신적 빈곤까지 닮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1920년대의 미국과 1960년대의 일본. 개츠비의 결핍은 데이지에 대한 집착으로, 나가사와의 결핍은 무수한 여자들과의 잠자리로 드러나지만 둘 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쓸쓸한 결말을 맞이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마음속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맹목적으로 향락을 쫓는 것이 잘못된 방향일 수 있음을 암시해주려는 것일까? 최근 '승츠비'라고 불렸던 빅뱅 승리의 '승리 게이트'사태를 보며 충격받음과 동시에 느끼는 바가 많다. 지금은 무슨 의견을 내놓기에 부족하지만 언젠가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더 많은 경험을 쌓는다면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