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랑 끝까지 갈래?

일탈을 꿈꾼 여대생의 속사정

by 서윤

습하고 답답한 공기 속에 서늘한 바람만이 더위를 식혀주는 여름의 늦은 밤. 손님맞이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바에 젊은 여자 손님 하나가 들어온다. 잔뜩 풀려 있는 눈동자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옷매무새. 겉보기에도 술에 잔뜩 취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손님은 ‘어서 오세요’라는 흔한 접대 멘트조차 무시한 채 카운터 바 앞에 앉아 다짜고짜 말을 꺼낸다.



오늘 나랑 끝까지 갈래?


“네?”



밤일을 하게 되면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게 된다고 하던데 만취한 손님은 숱하게 봐왔어도 아직 견습 바텐더인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혹시나 음지(陰地)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닐까 몸을 위아래로 한 번 쭉 훑어보았지만 얼굴 화장 상태나 입고 온 옷을 보았을 때 평범한 대학생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상기된 두 볼과 바를 넘어 내 코 끝까지 징하게 풍겨오는 술 냄새. 취하지 않은 척 애쓰며 말을 건네는 모습이 오히려 술에 많이 취했음을 반증하는 듯하다.


? 안 예뻐 보여? 매력 없어?”

“아니요, 충분히 예쁘고 매력 있어요.”

“그런데 왜 대답이 없?”


손님이 갑자기 손을 뻗어 술병을 닦고 있던 내 손목을 낚아채자 상반신의 절반이 바를 넘어 손님 쪽으로 기울어진다. 역시나 술을 마신 사람은 강하다. 가냘픈 팔뚝에서 어떻게 그리 강한 힘이 나오는 건지. 계속되는 그녀의 스킨십에 힘겹게 몸을 원위치시키고 손님을 바라본다. 크고 아름다운 두 눈.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엔 슬픔이 가득 차 있다.



신데렐라 칵테일



바를 찾는 손님은 매우 다양하다. 20대의 젊은 대학생에서부터 40, 50대의 중년 직장인까지.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학업, 진로와 같은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인간관계 유지에 대한 어려움, 또는 남들에게 말 못 할 소중한 비밀들. 하지만 손님들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비밀스러운 속사정들을 이곳 바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그것이 바만이 지니고 있는 환상적인 마법이라고나 할까.


“무슨 일 있어요?”


나와 마주 보고 있던 손님의 시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아직까지도 선명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 자국. 이 일을 하다 보면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자연스레 눈치와 센스가 는다. 나는 바 오른편에 놓여있는 온더락 잔에 얼음 3, 4조각을 넣고 찬물을 담아 손님 앞에 건넨다.


“남자들은 원래 그?”


차가운 얼음물을 한 번에 들이킨 뒤 한참 동안을 멍하니 빈 잔만 바라보던 손님이 마침내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계속 잘해주고 챙겨줬더니 이젠가 질린.”


대학에 와 1년 넘게 사귄 첫 남자 친구.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매일같이 챙겨주고 신경 써주었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남자친구와의 오랜 싸움 끝에 결국 오늘 헤어졌고 괘씸한 마음에 이제부터는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며 아무렇게나 살기로 결심했다고. 혼자서 술을 죽기 직전까지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려는 와중에 처음 보는 바 안에서 열심히 칵테일 잔을 정리하고 있던 내 모습이 눈에 띄어 들어와 보았단다.


“대체가 뭘 잘못한 걸?”


이곳에 서 있으면 연애에 서툰 나조차도 어느새 연애박사가 되어있다. 수없이 많은 손님들의 믿음직한 상담사가 되어준 덕이다. 나는 다른 손님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마치 내 주변 사람이 겪은 이야기인 양 각색하여 그녀에게 들려준다.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애인으로 인해 생긴 남자의 지나친 우월감.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듣기만 해도 화를 돋우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 그리고 끝끝내 찾아오는 그들의 뼈저린 후회. 말재주는 없지만 진심을 담은 나의 이야기에 손님이 조금씩 귀를 기울인다.


“신경 써줘서 고마. 밤늦게 괜히 실례한 것 같.”

“괜찮습니다. 혹시 칵테일 바는 자주 와보셨나요?”


손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의 의사표시를 한다. 나는 바 한편에 쌓여있는 메뉴판들 중 하나를 들어 손님 앞에 펼쳐 놓는다. 한참 동안 메뉴판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손님의 두 눈동자. 처음 와보는 칵테일 바이기에 원하는 메뉴를 선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메뉴 이름들을 하나하나 입으로 가볍게 웅얼거리던 손님은 무언가 크게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음··· 나한테 어울릴만한 거 뭐 없을까?”


추천이라. 바텐더에게는 가장 어려운 부탁인 동시에 가장 설레는 부탁이기도 하다. 나는 손님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손님의 취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특별히 좋아하는 과일이 있는지, 선호하는 술 베이스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레시피들 중에 손님과 어울리는, 손님이 좋아할 만한 레시피 하나를 조심스럽게 고른다.


버진 피나 콜라다 칵테일



오렌지 주스 1온스와 믹스 피나콜라다 2온스, 그리고 파인애플 주스 2온스를 얼음이 가득 담긴 셰이커 안에 넣고 가볍게 흔든다. 치키차카. 셰이커 안에 있는 얼음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울려 퍼질수록 손님의 기대감도 더욱 커진다. 셰이커의 캡을 열고 미리 얼음을 담아둔 고블렛 글라스에 내용물을 넣은 후 그 위에 상큼한 향의 파인애플 슬라이스와 체리를

살짝 올려주면 아름다운 백색을 지닌「버진 피나 콜라다」 완성. 레시피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술이 들어가 있지 않은 무(無) 알콜 칵테일이다.


손님은 잔 위로 올라오는 상큼한 향과 칵테일의 붉은 빛깔을 잠시 감상하더니 잔을 들어 천천히 입가에 가져다 댄다. 혀 안에 기분 좋게 감도는 달콤한 열대과일의 맛. 손님이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느라 감았던 눈을 뜨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다. 나로서는 가장 긴장이 되는 순간이다.


“우와, 진짜 맛있! 이거 뭘로 만든 거야?”


버진 피나 콜라다. 파인애플과 코코넛의 상큼한 과일 향이 감도는 칵테일인 피나 콜라다에 도수가 높은 술인 럼을 빼서 「Virgin」이라는 말이 붙었다. 실연을 겪은 젊은 아가씨의 위험한 일탈을 막아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주고자 하는 작은 소망과 늦은 밤 술에 취한 여성이 조심히 귀가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정성스레 만들었다. 손님이 이러한 나의 진심을 알아주면 좋을련만.


“레시피는 다음에 오실 때 알려드릴게요!”


나의 영업용 멘트에 손님이 크게 웃는다. 처음으로 보는 해맑은 미소다. 저렇게 환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준 손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파우치에서 카드를 꺼내 나에게 건네준다.


“고마. 다음에 꼭 다시 올!”


주섬주섬 짐을 챙긴 손님은 바에 들어오기 전보다 확실히 밝은 얼굴로 자리를 떠난다. 나의 이야기와 정성 가득한 칵테일 한 잔이 손님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기 있는 문을 다시 열고 나갈 때에는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홀가분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바를 찾은 손님이 보다 즐겁고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이곳을 매일같이 지키고 있는 견습 바텐더의 소박한 바람이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감싸 안는 여름의 어두운 새벽. 신촌의 한 칵테일 바에는 견습 바텐더 하나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사람과 각양각색의 사연. 그리고 잊지 못할 소중한 인연을 기대하면서.

keyword